세조대의 이르러 興佛의 기운과 더불어 도첩의 발급도 승려의 자질향상과 실행성 위주면에서 재조정되기에 이르렀다. 세조 3년(1457) 3월에 예조에 내린 교지 가운데서 직접 도첩에 관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一. 이미 禪師와 大禪師의 官敎를 받은 승려에게는 도첩의 유무를 다시 묻지 말 것.
一. 정축(세조 3년) 10월 1일 이후부터는 승려가 된 지 만 3개월이 되도록 도첩을 내지 않았을 경우에는 본인이거나 그 친척 및 가까운 이웃 중에서 도첩을 내지 못한 사유를 관에 알려야 하며, 신고하지 않으면 그 가족과 친척이 죄를 받게 된다. 만 3개월마다 반드시 신고하되 1년이 지나도록 도첩을 내지 못한 자는 환속시킬 것(≪世祖實錄≫권 7, 세조 3년 3월 병술).
지금까지 강압 일변도의 度僧策에서 벗어나 도첩문제를 조금 완화시킴으로써 승려들에게 잠시 숨돌길 여유를 주었다. 그러나 세조의 조처는 무조건 도승을 허용하거나 도첩제를 완화하려던 것이 아니라 그 자질과 실질적인 편의에 중점을 두고자 한 것이었다. 세조 7년 3월에는 형조의 상계에 의해 공사의 노비로서 승려가 될 경우에 갖추어야 할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一. 公賤(官奴)으로서 승려가 되려면 宗門에 신고해야 한다. 종문에서 金剛經·心經·薩怛陁(楞嚴呪)를 능히 암송하고 僧行이 가능한 자를 뽑아서 예조에 보고 하면, 예조에서 정전을 받아들여 도첩을 주고 그 이름과 主司의 이름을 형조에 이첩한다. 형조에서는 여러 衙門의 案籍에 그 사유를 기록하게 한다. 공천(官婢)으로 비구니가 되려는 자 또한 이 예에 의한다. 다만 尼僧은 본래 도첩이 없으므로 정전을 거둘 필요가 없다.
一. 종문에서 選試할 때 하나의 경전도 암송하지 못하면 승려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이를 예조에 보고하고 형조에 이첩하여 소속 아문에 알게 한다.
一. 私處의 노비(私賤)로서 본래 주인의 情願에 따라 승니가 되려는 자는 그 주인이 종문에 알리고 공천의 예에 의해 선발하되 본 주인의 使喚이 허용되지 않는다.
一. 공천으로 승려가 된 자는 석달이 되도록 도첩을 내지 못하면 본인이나 가족 및 친척 중에서 그 사유를 관에 알려야 하며, 알리지 않을 경우에는 가족과 친척들이 죄를 받게 된다. 석달이 되었을 때마다 반드시 신고해야 하며, 1년이 지나도 도첩을 내지 못한 자는 환속시킨다(≪世祖實錄≫권 23, 세조 7년 3월 경술).
승려가 되기 위해 노비가 내야 할 정전의 액수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으나, 위와 비슷한 내용이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는≪경국대전≫에는 정전이 正布(5升布) 30필로 되어 있다.604) 朝鮮總督府中樞院에서 간행한≪經國大典≫에 ‘丁錢’을 ‘正布二十匹’로 되어 있으며, 그 윗부분에 二十의 二를 ‘壤本 藝本 通編 會通 作三’이라고 註記하고 있어서 20필과 30필의 두 가지로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成宗實錄≫권 4, 성종 원년 4월 을유조에 있는 ‘正布三十匹’에 따르기로 한다.
앞에서 본 형조 상계의 경우는 공천과 사천의 출가 및 도첩 발급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을 뿐, 양반이나 평민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그런데≪경국대전≫에서는 양천의 구별없이 규정하면서 단지 사천만을 割註로 표시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양반이나 서민도 공천의 경우와 같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경국대전≫의 정전 30필도 양반·서민·천민의 차별없이 모두 똑같은 액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태조 이후 양반은 정포 100필, 서민은 150필, 천인은 200필의 정전을 내야 한다고 규정하여 각각 그 차등이 심하였는데, 이제 세조대에 이르러 모두 정포 30필로 정전을 통일하였다면 그 부담이 매우 감소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양반 자제가 정포 100필을 바치고 당시 이단으로 지탄받고 배척 당하던 불문에 출가한다는 것도 실제 어려운 일이지만, 가난한 서민이나 사유재산이 없는 노비가 각각 정포 150·200필을 바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조처는 승려가 되는 길을 국법으로 막으려던 방편이었다. 이러한 과중한 부담이 세조대에 대폭 줄어들면서 승려가 되려는 자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도첩제가 이와 같이 완화된 탓에 승려의 수가 매우 많아진 때문인지, 예종대에는 度僧의 조건을 다시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표면화되었다. 예종은 불과 일년 남짓 왕위에 있었지만 그 원년(1469) 10월에 韓明澮와 崔恒에게 명하여「禁僧條件」을 초안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도첩의 법이≪경국대전≫에 실려 있으나 그 가운데 鄕吏·驛子·官奴婢 등이 公役을 피하여 법을 어기고 삭발하는 자가 매우 많으므로, 이로부터 향리 등이 승려가 되려고 하면 그 읍에 신고하여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예조에 移文하여서 兩宗으로 하여금≪心經≫·≪金剛經≫·≪薩怛陁≫·≪法華經≫을 시험하여 합격자를 상계하고, 정포 50필을 정전으로 거둔 후에 도첩을 주도록 건의하였다. 또 이것을 어기는 자는 處斬하고 그 가족과 친지들이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자는 杖 백대를 치며, 검거하지 않은 수령은 파면 조치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법을 정하기 이전에 승려가 된 자로 50세 이하는 명년 정월 그믐날까지 스스로 관에 신고하면 그 신분을 허용하도록 안을 올렸다. 그러나 왕은 이 초안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여 여러 원로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고는 도첩법을 어기는 자를 참하지 말고 장 백대를 쳐서 환속시키도록 하였다.605)≪睿宗實錄≫권 8, 예종 원년 10월 정축.
여기에서 세조가 완화시킨 도첩제를 그 사후에 다시 강화해 갔음을 보게 된다. 곧 誦經 시험에도 부피가 적은 종전의 세 가지에서 분량이 많은≪法華經≫을 더 넣었으며, 30필의 정전포를 50필로 올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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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