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 불교
  • 2) 도첩제와 부역승
  • (1) 도첩제의 강화와 폐지
  • 다. 도첩제의 정지와 폐지

다. 도첩제의 정지와 폐지

 성종 원년(1470) 3월에는 예종 원년의 도첩제를 개정하여 강화된 부분을 다시 고쳐서 종전대로 환원시키도록 하였다. 즉 그 때 院相과 承政院에서 논의하여, 예종 원년에 度僧試經과목으로≪법화경≫을 새로 추가하고 정전을 20필이나 더 올렸는데, 실제 양민이 승려가 되는 데에는 50필의 정전이 너무 벅차며 또≪법화경≫도 그 분량이 많으므로,≪경국대전≫에 의한 종전의 규정대로 시행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아뢰었던 것이다.606)≪成宗實錄≫권 4, 성종 원년 3월 을유.

 왕의 조모인 貞熹大妃에 의해 도첩제가 처음의 규정대로 완화되었으나, 그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도승의 법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된다607)≪成宗實錄≫권 55, 성종 6년 5월 을해.고 주장하는 조신들의 의견에 따라 성종은 軍案을 작성하는 기간에는 도승을 허가하지 않도록 하였으며,608)≪成宗實錄≫권 72, 성종 7년 10월 임오. 또 각 도의 관찰사들에게 엄명을 내려 도첩이 없는 승려들을 모두 색출해 내어 역을 피하기 위해 출가한 자들을 철저히 방지하도록 하였다.609)≪成宗實錄≫권 77, 성종 8년 윤2월 신유·임술. 그러면서도 성종 14년 무렵부터는 궁궐 등의 보수공사에 동원된 승려들에게 도첩을 발급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610)≪成宗實錄≫권 162, 성종 15년 정월 병진·정사 및 권 163, 성종 15년 2월 경신. 그래서 사헌부와 사간원 등에서 여러 차례 役僧들에게 도첩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상계 하였으나 왕은 이를 듣지 않았다.611)≪成宗實錄≫권 163, 성종 15년 2월 기미·병인.

 승려들에게 도첩을 주지 말고 불교를 아예 없애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성종은 選僧과 度僧이 비록 正道는 아니지만 祖宗朝로부터 오랫동안 행하였으므로 없앨 수가 없으며, 자신이 숭불하지 않으므로 이 법을 고치지 않더라도 승려들이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고 하였다.612)≪成宗實錄≫권 261, 성종 23년 정월 경인. 그러나 얼마 후 도승의 주무처인 예조에서「禁僧節目」을 상계하였으므로 성종 軍額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도첩제를 정지[姑停]하였다.613)≪成宗實錄≫권 262, 성종 23년 2월 갑진.

 이러한 조처는 성종 22년(1491)에 북녘의 兀狄哈이 침범하자 許琮을 都元帥로 삼아 北征케 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 요컨대 이 서북정벌로 병력이 많이 필요한 데다가 또 군역을 피하여 머리를 깎고 출가하는 자가 많았으므로 그 군사력 확보를 위한 방편으로 도첩발급을 정지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연산군일기≫나≪攷事撮要≫등에서 “성종이 度僧法을 파하였다”고 표현하였기 때문인지 근래의 논저들에서는 성종이 도첩제를 폐지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614) 高橋亭,≪李朝佛敎≫(寶文館, 1929), 234쪽.
安啓賢,<佛敎 抑制策과 佛敎界의 動向>(≪한국사≫11, 국사편찬위원회, 1974), 159쪽.
그러나 성종 자신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姑停」은 임시 방편적인 정지이지 결코 완전히 폐지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종은≪경국대전≫에 있는 그 조항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던 것이며, 그 스스로도 도첩을 금지한 것은 군인의 수효가 많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성종은 그 이후≪경국대전≫에 명시된 도첩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본래는「姑停」(또는 停·禁)이라고 하였으나 나중에는「罷」라고 표기하였던 듯하다.

 연산군은 성종이 도첩제를 중지한 것은 군병의 수효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므로 도승을 금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1년에 10인에게 도첩을 주면 어떤지 승정원에 묻기도 하였다.615)≪燕山君日記≫권 25, 연산군 3년 7월 경자·8월 을해.

 그러한 연산군도 나중에는 정치부재의 상태에 빠지게 되어 양종과 도승을 염두에 두지 않았으므로 자연히 도첩제는 폐지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다가 중종 11년(1516) 12월에는 그나마 명목만이라도 남아 있던≪경국대전≫의 도승조가 삭제되기에 이르렀으므로,616)≪中宗實錄≫권 27, 중종 11년 12월 임술. 명종 5년(1550)에 일시적이나마 양종과 도승제가 부활될 때까지 도첩제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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