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 불교
  • 3) 왕실의 불교숭신과 불교행사
  • (1) 숭불의 왕과 그 불사
  • 다. 세조의 흥불과 불교 문화사업

다. 세조의 흥불과 불교 문화사업

 조선 초기 억불시대에 불교를 부흥시켰던 세조는 즉위 이전부터 불교와는 인연이 깊었던 듯하다. 그가 부왕의 명으로≪석보상절≫을 편찬하였기 때문인지는 모르나 일찍이 석가와 공자의 도에 대하여 그 우열을 언급하는 자리에서 “釋氏의 道는 孔氏의 도보다 나을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의 차이이다”648)≪世宗實錄≫권 122, 세종 30년 12월 정사.라고 할 정도였다. 따라서 왕위에 오르자 곧 불교를 신봉하고 보호하는 정책을 펴나갔을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세조 3년(1457)에 왕은 세자의 구병을 위해 21명의 승려를 모아 慶會樓 아래에서 밤새워 孔雀齋를 作法하게 하고, 의정부 당상 및 6조판서 이상과 승지를 齋所에 들어가 기도하도록 하였다.649)≪世祖實錄≫권 8, 세조 3년 7월 기축. 9월에 세자가 죽자 왕은≪大藏經≫과≪華嚴經≫을 각 한 질씩,≪法華經≫·≪楞嚴經≫·≪翻譯名義集≫각각 100질,≪地藏經≫과≪懺法≫을 각각 14질씩을 간인하게 하고, 또≪법화경≫·≪지장경≫·≪大乘起信論≫·≪梵網經≫·≪行願品≫각 한 질씩을 필사하게 하였다. 특히≪금강경≫과≪법화경≫을 왕이 손수 베껴 썼고,≪金剛經五家解說誼≫와≪校定永嘉集說誼≫및≪證道歌集註≫등의 불서를 각각 100질씩 간행하게 하였다.650)≪金剛經五家解≫(雲興寺板) 御製跋文.

 세조가 재위한 14년간에 있었던 그 많은 숭불호법의 행사들은 낱낱이 다 들기 어려울 정도인데, 그가 행하였던 중요 불사를 다음의 세 가지로 크게 묶을 수 있다. 첫째는 승려의 권익을 옹호하여 불교의 위치를 보장한 것이며, 둘째는 사원을 세우거나 중수하고 三寶를 숭봉하는 등의 불사를 일으킨 것이고, 셋째는 불전을 국어로 번역하여 간행하고 대장경 등 불교전적을 간인하며 또한 불교음악·무용 등의 불교문화사업을 크게 일으킨 일들이다.

 세조 3년에 예조에 傳旨하여, 관원이나 유생은 절에 올라가지 말 것. 죄를 지은 승려가 있어서 그 죄를 심문해야 할 경우에는 반드시 왕에게 아뢴 다음에 관원이 절에 올라가야 하며, 죄를 지은 승려가 있으면 도첩을 상고하여 상계하고 허락이 있은 다음에 죄를 다스릴 것. 절들에 부과된 부역 외의 모든 노역은 일체 없앨 것 등의 조례를 시행하게 하였다.651)≪世祖實錄≫권 7, 세조 3년 3월 병술. 그리고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세조는 度僧과 選試의 법을 정해≪경국대전≫에 싣고 후대 왕들로 하여금 준거토록 하였으므로, 그의 재위기간 동안에 불교의 위치가 보장되고 승려의 권익이 옹호되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세조의 대표적인 불사의 하나로 大圓覺寺의 창건을 들 수 있다. 이 절은 동왕 10년 5월에 착수되어 그 이듬해 4월에 완공되었고,652)≪世祖實錄≫권 33, 세조 10년 5월 을묘·11년 4월 계미. 여기에는 큰 불상과 종이 안치되었다. 또 세조 13년에는 석탑을 세웠는데 지금도 그 터(鐘路 탑골공원)에 남아 있다. 이 밖에도 세조느 正因寺를 세우고 海印寺·上院寺·月精寺·檜巖寺·靑鶴寺·道岬寺·神勒寺·表訓寺 등 많은 절의 보수와 중수를 도왔으며, 俗離山 福泉寺와 襄陽 洛山寺 및 五臺山과 金剛山의 여러 절들을 찾아 三寶에 공양하는 등 불법의 外護에 힘썼다.

 그러나 세조대의 불사 가운데 무엇보다도 역사에 길이 남을 대불사는 한문경전 뿐이었던 당시에 불경을 우리 글로 번역하여 간행한 일이었다. 세조는 동왕 5년에≪月印釋譜≫를 간행하였고, 7년 6월에 刊經都監을 설치하여653)≪世祖實錄≫권 24, 세조 7년 6월 을유. 많은 불교전적을 우리글로 번역하여 간행토록 하였다. 그 이듬해에는≪楞嚴經諺解≫를 완성한 것을 비롯하여≪법화경≫·≪금강경≫·≪心經≫·≪圓覺經≫·≪永嘉集≫등을 계속해서 국역으로 간행하였다. 이 때 간행된 불전들이 우리의 글자에 의해 처음으로 불교경전이 번역되었다는 사실과, 거기에 쓰인 글자와 말들이 오늘날 우리 국어 연구에 귀중한 보배구실을 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그 민족문화사적 가치와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세조 6년에는<靈山會上曲>(靈山會相이라고도 함)과 蓮花臺舞를 제작하여 正雅樂으로 삼았다.<영산회상곡>은 세종대의 廟庭正樂인<鳳凰吟>을 확대하여 편제한 大合奏樂으로서 ‘靈山會上佛菩薩’을 칭하는 데에서 붙여진 곡명이다. 연화대무는 신라 이래의 處容戱를 받아들여 연화대를 중심으로<영산회상곡>을 연주하면서 處容舞와 花舞를 추고 彌陀讚·本師讚·觀音讚을 和唱하는 불교 가무극이라 할 수 있다.654)≪慵齋叢話≫권 1.
李能和, 앞의 책, 410∼411·641∼6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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