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 불교
  • 6) 당시의 고승들
  • (3) 세조대의 고승들
  • 가. 혜각존자 신미

가. 혜각존자 신미

 信眉는 세조의 흥불사업을 도운 총신이었던 金守溫의 친형이다. 신미의 이름이 기록에 처음 보이는 것은 세종 29년(1447) 6월의 기록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首陽大君 王柔와 安平大君 瑢이 혹신하여 신미를 높은 자리에 앉히고 그앞에 무릎을 꿇고 절하며 예의를 다하여 공양하였다고 한다.691)≪世宗實錄≫권 116, 세종 29년 6월 병인. 이로 볼 때 세조는 이미 수양대군 시절부터 신미를 존신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이듬해인 세종 30년에 유생 兪尙諧 등은 상소하여, 요승 신미가 嬌詐함이 이루 셀 수 없고 스스로 생불이라 하며, 겉으로는 修善의 방법을 행하고 속으로는 寄生의 꾀를 품어서 사람의 마음을 현혹하고 聖學을 황페케 하므로 목베어 요망함을 근절하도록 촉구하였다.692)≪世宗實錄≫권 121, 세종 30년 7월 경술. 이를 통해 볼 때 신미를 추종하는 세력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생들의 반대에도 왕실이 신미에 대한 존숭은 계속되었다. 즉 세종 32년 정월에 왕은 병이 들자 불사를 크게 일으키고 신미를 寢殿으로 맞아들여 설법하게 하고 존중의 예로 대접하였다.693)≪世宗實錄≫권 127, 세종 32년 정월 임인. 세종이 그해 2월에 세상을 떠나고 뒤를 이어 즉위한 문종은 부왕의 뜻을 받들어 신미에게 ‘禪敎宗都摠攝密傳正法悲智雙運祐國利世圓融無碍慧覺尊者’라는 존호를 주었으며,694)≪文宗實錄≫권 2, 문종 즉위년 7월 무신. 원년(1451) 9월에는 신미의 주처인 俗離山 福泉寺에 안평대군을 보내어 세종에의해 시작되어 완공을 보게 된 重創佛事를 살펴보게 하였다. 세조는 등극한 이후 더욱 신미를 敬信하였다. 세조 10년(1464)에 왕은 속리산 복천사로 가서 신미를 만났으며, 철 5,000근과 쌀 500섬, 綿布와 正布 각 500필을 하사하였고, 또 신미는 왕을 위하여 五臺山 上院寺를 중창하였다.695)≪世祖實錄≫권 32, 세조 10년 2월 경술·신해·권 34, 세종 10년 12월 신축 및 권 35, 세종 11년 2월 정유.<五臺山上院寺重創勸善文>(月精寺 所藏).

 그러나 세조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신미가 국왕으로부터 종전처럼 대접받지는 못한 듯하다. 예종 원년에 승려들에게≪금강경≫과≪법화경≫의 講을 시험보여서 강의를 못하는 승려를 환속시키려 하였는데, 그 소식을 들은 신미가 왕에게 승려 중에는 강의에 능한 자가 많지 않으므로 講經 대신에 誦經으로 바꾸어 試僧해 줄 것을 은밀히 간청하였다. 그 때 왕은 아직 확정하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묻고는 廣平大君의 집에 연금하도록 하였다.696)≪睿宗實錄≫권 6, 예종 원년 6월 기묘. 신미가 왕으로부터 선왕대와는 달리 제대로 예우를 받지 못하게 되자, 사간원에서는 그의 행차에 驛馬를 주라는 왕명을 취소하도록 청하였다. 그러나 뒤를 이는 성종은 선왕이 예우하였던 승려이므로 역마의 편의만은 제공해 주도록 하였다.

 신미는 세조의 印經佛事와 刊經都監 설치 및 그 후의 불전 국역에 큰 힘이 되었으며, 그 밖의 불교 문화사업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세종과 문종 및 세조에 의해 존숭을 받으며 활동하였다. 그에 대한 기록이≪成宗實錄≫의 4년(1473) 기사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장수하였던 듯하나, 그 후의 행적은 자세히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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