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祖는 신미·학열과 더불어 세조대에 3和尙으로 불리웠다. 세조는 이들을 매우 존경하였는데,699)≪成宗實錄≫권 161, 성종 14년 12월 무자. 이 중에서 신미가 스승이고 두 사람은 그의 제자이다. 학조는 字가 燈谷인데, 생몰년대는 알 수 없다. 학조는 세조 13년(1467)에 왕명으로 금강산 楡岾寺를 중창한 것으로부터 중종 15년(1520) 봄에 海印寺 대장경 일부를 인간한 일에 이르기까지 무려 50여 년에 걸쳐서≪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나타난다. 즉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많은 불사에 관여하였다. 그러한 까닭으로 유신들의 눈총을 많이 받아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친척들을 벼슬하도록 했고 여러 대비의 존신을 받아 한마디 보고도 없이 마음대로 騶從을 거느리고 다닌다고 비판받았다.700)≪成宗實錄≫권 155, 성종 14년 6월 정축. 또 直指寺에 퇴거하여 산업을 크게 경영함으로써 백성들에게 많은 페를 끼쳤다고 평가되기에 이르렀다.701)≪成宗實錄≫권 161, 성종 14년 12월 무자.
이러한 비판은 모두 ‘史臣曰’이라 하여 實錄 纂者가 제기한 것인데, 불교를 싫어하는 성종이 학조의 요청대로 給馬를 허락하고 또 학조의 병에 특명으로 內醫를 보내는 등 호의를 보이자 그와 같이 기록한 것이다. 또 학조가 성종 20년(1489)에 해인사를 중수하고 있을 때 유신들은 그가 해인사를 중수함으로써 도민에게 폐를 끼치고 있으므로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702)≪成宗實錄≫권 229, 성종 20년 6월 병인 및 권 231, 성종 20년 8월 임자. 그리고 학조의 해인사 修葺의 사유를 요승의 사설이라고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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