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는 유교를 통하여 나라 이념을 확고하게 하면서도 前朝의 儺禮나 山臺雜劇은 그대로 계승하여 더욱 성행하였다. 태조는 조선개국을 맞아 고려의 유풍인 팔관회와 연등회의 의식을 파한다고 하면서도 고려 풍속의 하나인 나례나 산대잡극은 그대로 지속시켜 왔으며 나라의 기강을 확립하고자 모든 巫現들의 淫祀는 금지시키면서도 종묘와 사직을 숭배하여 그 제사에는 물론, 사신들을 맞이할 때면 으레 綵棚山臺하에 나례를 베풀고 雜戲百般으로 이들을 기쁘게 하였다.1026)≪太祖實錄≫권 1, 총론.
태조 2년(1393) 2월 계룡산에 갔다가 개경으로 돌아올 때 結綵儺禮가 거행되었고,1027)≪太祖實錄≫권 3, 태조 2년 2월 임인. 같은 해 10월에 典樂署에 武工房을 설치하여 武樂을 습득케 하고 夢金尺 등 신악을 일으키기도 하였다.1028)≪太祖實錄≫권 4, 태조 2년 10월 기해.
태조 7년에는 명나라 사신을 맞이한 최초의 기록으로 같은해 6월에 있었던 雜伎綵棚1029)≪太祖實錄≫권 14, 태조 7년 6월 정묘.이 있으니 잡기놀음이 상연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태종대에는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산대나례와 백희는 물론 새 도읍지 한양에 행차하여 그의 즉위를 太廟에 고하고 개경으로 환궁할 때는 모든 군신이 나와 山棚結綵, 儺禮百戲를 펼치면서 숭인문 밖에서 맞이하였고, 그 때 성균관 생도와 교방창기 등은 가요를 하고 백관들은 술잔을 받쳐 하례를 베풀었다.1030)≪太宗實錄≫권 1, 태종 원년 4월 임술. 태종은 便殿에서 나례백희를 구경하였으며1031)≪太宗實錄≫권 15, 태종 8년 4월 임진. 雅樂·典樂·遷轉의 법을 정하여 종묘에서는 아악을 燕享에서는 향악과 당악을 사용토록 하는 등 이를 숭상하였다.1032)≪太宗實錄≫권 17, 태종 9년 4월 기묘.
세종대에도 胎室을 晉州로 移安할 때 그 安胎處에다 채붕을 세워 나희를 베풀었으며,1033)≪世宗實錄≫권 6, 세종 즉위년 11월 신해. 또한 迎使 때에는 나례를 금하고 채붕만을 세워 사신들을 즐겁게 하였다.1034)≪世宗實錄≫권 24, 세종 6년 5월 계묘. 세종 8년(1426) 12월 除夜에는 구나와는 상관없이 잡기와 나인들에게 목면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며, 또 세종 25년 정월에도 처용무가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女妓를 제외하고 남자를 기용하였다.
조선시대의 산대희는 나례·나희·산대나례·산대잡희 등으로 그 명칭을 혼용하였으며 나례도감 또는 산대도감으로 관장하여 중국 사신을 영접할 때와 季冬儺禮儀 때, 祔廟還宮 때, 宗廟親祭 때, 謁聖 때, 이 밖에 行幸 때, 安胎 때, 進豊呈 때, 地方長官 등의 환영 때 內農作 때와 각종 宴樂歡娛 때에 광범위하게 쓰여졌으며, 그 종류도 다채로와졌으나 기본적으로는 고려의 산대잡극이나 나희의 내용과 크게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문종 즉위년(1450) 6월의 迎詔 때 나례의 설치여부에 대한 논의를 통해 조선시대 나례희의 특색을 엿볼 수 있다. 즉 ‘戲謔’의 내용을 廣大의 ‘西人, 注叱, 弄鈴, 斤頭’ 등 規式之戲와 水尺(俳優)의 ‘僧廣大’ 등 笑謔之戲와 樂工들의 ‘音樂’의 세 부문으로 나누고 있는데, 고려의 백희와 음악 양부에 비해 소학지희가 뚜렷이 독립된 것과≪악학궤범≫의 학연화대처용무합설조로 보아 驅儺 후의 歌舞部가 확장된 것을 특색으로 들 수 있겠다.1035)崔正如,<산대도감극성립의 제문제>(≪계명대학교 논문집≫1, 1973). 위에서 든 규식지희 즉 백희의 내용에서 ‘서인’은 혹시 ‘西胡戲’를 말한 것인지 불명하며, ‘주질’은 줄광대 즉 줄타기, ‘농령’은 弄丸系의 밤마리 대 廣大패의 竹방울받기 같은 것, ‘근두’는 筋斗撲蛈을 말한 것 같다. 모두 散樂계통의 奇伎曲藝로서 萬物草에는 ‘山臺’를 ‘근두박질’이라고 새긴 것으로 보아 산대에서도 놀던 대표적인 演目의 하나였던 것을 알 수 있다.1036)이두현,≪한국의 가면극≫(일지사, 1979), 84쪽.
역대 구나와 進宴에서 반드시 추어오던 처용무는 성종대에≪악학궤범≫에 있는 바와 같이 학연화대처용무합설로서 歌舞劇으로 종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처용무는 왕조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신라말의 구나적인 성격의 춤으로 시작되어 고려시대에는 한층 그 기상이 강렬해 지더니 조선시대도 구나무로써 궁중의 잡귀를 쫓는 나례의 중심적인 의식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궁중의 연악무로 고관들이나 심지어 국왕까지도 춤을 추었으며 외국 사신의 접대연에서도 추어졌다.
고려 말 李穀의 시에 의하면 처용무가 二人舞였으며, 成俔의≪慵齋叢話≫에는 赤色面에 黑布紗帽의 一人舞를 읊고 있다. 그 후 처용무는 중국의 五方舞의 영향으로 五方處容舞로 확대되고,1037)車柱環,≪당악연구-고려사악지-≫(汎學圖書, 1976), 70∼73쪽. 세종과 세조대의 대수정을 거쳐 처용무는≪악학궤범≫에 보이는 대로 학연화대처용무합설로 종합가무극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처용무는 궁중정재의 합설무로 가무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대부들의 공사석의 宴樂에서도 오방처용무가 演舞되었음은 檀園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平安監司歡迎圖(<그림>)나 士大夫家의 壽宴을 기록한 필자미상의 湛樂宴圖의 오방처용무도에서도 알 수 있다.
≪악학궤범≫에는 12월 晦日 하루 전날 궁중에서 연행되던 나례 때 처음과 마지막 두 차례에 걸쳐 처용무를 추었다. 처음에는 오방처용무만 추고, 마지막에도 역시 오방처용무를 추되, 足蹈歡舞 또는 搖身極歡이라는 설명에서 보듯이 처음과 다른 점이 있고, 더욱이 처용무에 이어 학무와 연화대 정재를 연출한 다음 彌陀讚·本師讚·觀音讚을 노래하였다.1038)成 俔,≪樂學軌範≫권 5.
즉 처음의 처용무는 구나하는 의식적인 춤이고, 마지막의 처용무와 이에 이어 학무, 연화대무 및 미타찬 이하 불가를 화창하는 장면은 다분히 오락적인 요소를 띠고 있다.1039)장사훈, 앞의 책, 151쪽.
조선 중기에 접어들어 임진왜란 이후부터는 세말나례의 풍속은 사라졌고 따라서 처용무도 얼마간 자취를 감추는 듯했다. 그러다가 광해군대에 이르러 다시 살아났지만 인조대에 이르러서는 나라의 긴축재정으로 점차 식어갔다. 그리고 숙종대 이후 조선 후기에는 예전의 종합 연출된 학연화대처용무부설이 아니고 세 가지 춤이 각각 독립되어 공연되었다. 그러나≪교방제보≫(1872)에 연화대무에 학무를 겸하는 것이라고 하여 연꽃 속에서 나온 두 童女가 두 학을 각각 타고 추는 춤이 있어 합설무의 잔영을 보여주고 있으며, 조선 말기의≪궁중정재무도홀기≫에 의하면 성종대에 연출되던 그 마지막 처용무의 잔영으로 미타찬 이하 불가가 끼어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 밖에 궁중가무에는 연산군대에 豊頭舞라는 것이 있어 왕이 스스로 가면을 쓰고 춤을 잘 추었다는 기록이 보이나 어떠한 가면무였는지 후세에 전하지 않아 알 수가 없다.
다음으로 迎使 때의 산대잡희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읊은 것으로 성종 19년(1488) 3월에 내조한 명의 사신 董越의<朝鮮賦>가 있다. 그가 평양, 황주 및 서울 광화문에서 본 산대잡희의 내용은 吐火, 曼衍魚龍之戲, 舞童, 筋斗(근두박질), 줄타기, 攝獨趫 즉 竹廣大 등 散樂百戲와 사자·코끼리 등의 假像의 陣列이었다. 만연어용지희의 ‘曼衍’은 漢의 張衡의 시<西京賦>에도 보이는데 龍陀熊虎의 假頭를 쓰고 춤추는 놀이이다. 여기서는 魚龍과 곰의 가두무가 나왔던 것 같다.
한편 성종대의 성현의<觀儺詩>에 보면 채붕을 시설하고 울긋불긋 화려한 의상을 입은 무용수가 종횡으로 난무하는 모습과 弄丸, 줄타기(步索), 꼭두놀음, 솟대놀이(長竿戲) 등을 나례의 놀이로 읊었는데 모두 이른바 산악백희인 규식지희에 속하는 놀이들이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