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3. 제도의 개혁
  • 2) 경제부문
  • (1) 농업기술의 도입과 상업적 농업의 진흥
  • 나. 농무목축시험장과 농무학당

나. 농무목축시험장과 농무학당

조선정부는 또한 개화파의 주도하에 새로운 기술과 경영기법의 수용을 통한 농업진흥을 꾀하였다. 개항 이후 일본과 미국을 방문한 조선정부의 지도자들은 조선의 농업이 이들 나라에 비해 뒤떨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농업을 근본으로 삼고있는 나라에서 농업이 다른 나라에 비해 뒤떨어져 있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정부의 지도자들은 이들 나라로부터 선진 농법과 기술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였다.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던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은 1882년에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온 후 농업기술 전문가를 양성하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 영향으로 서재창이 중심이 되어 농업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였고,354) 孫仁銖,≪韓國開化敎育硏究≫(一志社, 1981), 266쪽. 안종수는 일본인 농학자 津田 仙으로부터 농서를 구입하고 이를 바탕으로≪농정신편≫을 저술하여 서양의 농법을 국내에 소개하였다.355) 李光麟,<農法의 導入>(앞의 책, 1981a), 246쪽. 또한 1882년 미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한 뒤 미국을 방문하였던 보빙사 일행은 보스턴박람회와 월코트모범농장 시찰을 통해 미국의 농법과 농업기계 기술 등이 우리보다 발달하고 있음을 알고 이를 배워들이려고 하였다. 따라서 보빙사 일행은 미국 농무성으로부터 각종 농작물의 종자를 얻는 한편 전권대신 민영익은 미국무장관 프릴링하이젠(F. T. Frelinghuysen)에게 기술자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미국을 방문했던 보빙사 일행은 귀국하여 미국시찰에 대한 보고와 함께 국왕에게 새로운 농업기술을 도입하기 위한 모범농장의 설치를 건의하였다. 이에 국왕은 서울 망우리 일대의 광대한 토지를 모범농장부지로 하사하였고, 1884년 초 최경석을 관리관으로 삼아 농무목축시험장을 설치하였다.356) 李光麟,<農務牧畜試驗場의 設置에 대하여>(앞의 책, 1981b), 203∼218쪽. 모범농장의 설치와 함께 조선정부는 미국의 농기계 수입을 추진하여 벼베는 기계, 벼 떠는 기계, 심는 기계, 인분 뿌리는 기계, 저울, 보습과 쇠시랑 등 미국에서 사용되고 있던 새로운 종류의 기계들을 수입하였다.357) 李光麟, 위의 글, 208쪽.

모범농장에는 각종 농작물과 야채, 과수들을 재배하였다. 보빙사 일행이 미국에서 얻어 온 것, 뒤에 미국에서 보내온 것, 그리고 재래종 등 많은 종류의 것을 시험 재배하였다. 그리고 1년 뒤 이곳에서 시험한 재배법과 사용법을 소개한 해설서를 첨부하여 수확물의 종자를 305개 처에 달하는 지방 군현에 보내 재배토록 권하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편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소와 말 등의 가축도 들여다 품종개량과 사육방법의 개선을 꾀하고 버터 치즈까지 만들 수 있는 낙농업도 계획하였다.358) 李光麟,<農法의 導入>(앞의 책, 1981a), 246∼248쪽.

그러나 농무목축시험장은 1886년 봄 큰 시련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 동안 열성적으로 시험장을 경영해오던 최경석이 급사했기 때문이었다. 최경석은 급변하는 정치적 변혁기에 정치보다는 농업문제의 해결에 더 열성적이었다. 보빙사의 수원으로 미국을 방문하던 당시부터 동료 수원인 변수 등과 함께 미국의 선진적인 농업기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의 연구와 보급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었고 그 결과 병을 얻어 급사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359) 李光麟, 앞(주 56과 같음)의 글. 최경석과 같이 보빙사 수원의 일원이었던 변수는 1882년 김옥균을 수행하여 일본에 갔다가 교토에 남아 양잠학과 화학을 공부하였고, 갑신정변 후 미국에 망명하여 메릴랜드주립농과대학에서 농학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그는 1890년 10월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360)李光麟,<韓國 最初의 美國大學 卒業生 邊燧>(≪韓國開化史의 諸問題≫, 1990), 64∼90쪽. 이렇듯이 개화파 인사들은 선진 산업기술을 직접 배워 조선의 산업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하였다. 미국의 선진 농업기술을 배워들이려 했던 이 두 사람의 죽음은 조선으로서는 큰 불운이었다고 할 것이다.

최경석의 죽음으로 경영이 어려워진 시험장을 정부는 농목국으로 개칭하고 내무부 농무사에서 관할하게 하였다. 조선정부는 일찍부터 미국의 기술자를 초빙하여 선진 농업기술을 배워들이기 위해 미국정부에 기술자의 파견을 요청한 바 있었다. 그러나 미국정부가 기술자의 파견에 선뜻 응하지 않았으므로 내무부 농무사는 마침 한국에 온 영국인 기사 재프리(R. Jaffray)와 1887년 9월 1일부로 고빙계약을 체결하였다. 정부는 재프리를 통해 2년제 농무학당 즉 농업학교를 세워 농업기술자를 양성할 계획이었다. 재프리는 조선정부의 요청에 따라 부족한 농기구의 수입을 추진하는 한편 농업학교 설립에 열성을 기울이었다. 그러나 일을 시작한 지 10개월 뒤인 1888년 7월 재프리 역시 병사하였다. 이후 정부는 시험장 경영에 의욕을 상실하였고 농업학교 설립은 흐지부지 된 채, 약간의 외국종 야채와 곡식을 생산하는 농장과 목장으로 명맥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361) 李光麟,<農務牧畜試驗場의 설치에 대하여>(앞의 책, 1981b), 214∼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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