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Ⅴ. 갑신정변
  • 3. 갑신정변의 전개
  • 3) 개화정권의 수립
  • (3) 개화파 신정부의 혁신정강 공포
  • 나. 양반신분제도·문벌제도의 폐지와 인재등용의 공포

나. 양반신분제도·문벌제도의 폐지와 인재등용의 공포

갑신정변의 혁신정강 제2조인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평등의 권리를 제정하고, 사람의 능력으로써 관직을 택하게 하지 관직으로써 사람을 택하지 않을 것’은, ①양반신분제도의 폐지에 의한 국민평등권리의 제정, ②문벌제도의 폐지, ③인재의 등용을 정식으로 공포한 것이었다.

갑신정변의 주동자 김옥균은 양반신분제도의 폐해에 대해 국왕에게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신이 다년 견문에 의거하여 폐하께 주상한 바 있사온대, 폐하는 이를 기억하시나이까. 그 뜻은 금일 우리 나라 이른바 양반을 芟除함에 있나이다. 우리 나라 중고 이전 국운이 융성할 때에는 일체의 기계 물산이 동양 2국(중국과 일본-인용자)보다 으뜸이었는데 이제 모두 폐절에 속하여 그 흔적도 없음은 다른 연고가 아니옵고 양반의 발호 전횡으로 인하여 그렇게 되었나이다.

인민이 一物을 제조하면 양반관리의 輩가 이를 횡탈하고, 백성이 辛苦하여 銖錙(작은 재물)를 축적하면 양반관리들이 와서 이를 약취하는 고로, 인민이 말하되 자력으로 自作하여 衣食코자 하는 때는 양반관리가 그 利를 흡수할 뿐만 아니라 심함에 이르러서는 귀중한 생명을 잃을 염려가 있으니, 차라리 농업·상업·공업의 여러 산업을 폐기하여 위험을 면함만 같지 못하다 하여 이에 遊食의民이 전국에 충만하여 국력이 날로 소모에 돌아감에 이르렀나이다(金玉均,<池運永事件糾彈上疏文(高宗에의 上疏文)>, 全集, 146∼147쪽).

김옥균의 이 상소문은 1886년에 올린 것이지만, ‘신이 다년간 견문에 의거하여 폐하께 주상한 바 있사온대’라고 쓴 바와 같이, 갑신정변 이전에도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김옥균이 양반신분제도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양반신분제도·문벌제도의 폐지를 주장한 논거가 근대적이고 자본주의적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고대에 중국과 일본보다도 으뜸이었던 우리 나라의 산업이 자기시대에 모두 폐절되게끔 된 원인을 양반신분제도의 폐해에 있다고 지적하면서, ① 백성들이 물건을 하나 제조해 내면 양반들이 이를 횡탈해 가고, ② 백성들이 간신히 극소의 자본을 축적해도 양반들이 이를 약탈해 빼앗아 가버리므로, ③ 백성들에 의한 공업생산도 불가능하게 되고, ④ 백성들에 의한 자본축적도 불가능하게 되며, ⑤ 백성들이 자립적 생산을 하여 여유있게 생활코자 하면 양반관리들이 그 이익을 빼앗아 갈 뿐만 아니라, ⑥ 백성들이 빼앗기지 않으려고 할 때에는 귀중한 생명까지 잃을 염려가 있기 때문에, ⑦ 백성들은 농업·공업·상업 등 산업을 포기하게 되어 마침내 국력이 쇠퇴하게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김옥균의 이러한 주장은 양반신분제도가 산업발전과 자본축적에 가장 큰 질곡이므로 이를 단칼에 삼제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근대자본주의적 성격의 주장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서재필은 김옥균의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이 우리 나라의 완전 자주독립정치의 실현과 함께 ‘귀족타파’875) 金道泰 編, 위의 책, 86쪽.에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또한 갑신정변의 혁신정강을 목격했던 일본인은 개화당이 갑신정변 때 ‘양반의 권리를 억지하고 常民의 권리를 높인다’876) 井上角五郎,<漢城迺殘夢>(≪風俗畵集≫, 17-84 호외), 12쪽.는 개혁안을 제시했었다고 기록하였다. 김옥균은 또한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방금 세계가 상업을 주로 하여 서로 생업의 많음을 경쟁하는 때를 당하여 양반을 제거하여 그 폐단의 원천을 모두 없애는 일을 힘쓰지 않으면 국가의 폐망을 기대할 뿐이다(金玉均,<池運永事件糾彈上疏文>, 全集, 147쪽).

이러한 사상과 관점에서 1884년 갑신정변의 혁신정강은 누천년 묵어 온 귀족신분제도와 양반신분제도를 아예 폐지하고 국민평등의 권리와 제도를 제정하겠다고 정책강령을 공포한 것이었다.

한편 문벌제도의 폐지는 양반신분제도의 폐지와 표리관계를 이루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왕조 사회와 정치의 형편은 양반문벌들이 형성되어 그들의 족친이 아니면 아무리 유능한 인재라도 잘 등용치 않고 있었다. 반면에 閥閱의 일원이면 무능부패한 자들도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관직을 주고 있었다. 특히 갑신정변 직전에는 수구파 민씨 척족과 몇 개의 문벌들이 정부의 요직을 거의 모두 차지하여 나라의 발전은 막히고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있었다.

김옥균은 이미 갑신정변 이전에 일찍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반드시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877) 金玉均,<治道略論>(全集, 3쪽).고 강조했었다. 김옥균은 그 후에도 문벌폐지와 인재등용의 중요성에 대해, “폐하가 이를 맹성하사 속히 무식무능하고 수구완루의 大臣輔國을 해임하여 문벌을 폐지하고 인재를 선발”878) 金玉均,<池運永事件糾彈上疏文>(全集, 3쪽).해 등용할 것을 국왕에게 상소하였다.

갑신정변의 혁신정강 제2조를 볼 때, 만일 개화당의 정변이 실패하지 않고 성공했더라면, 우리 나라 양반신분제도와 문벌의 폐지는 1894년의 갑오개혁·동학농민운동 때보다 10년 앞서 이미 1884년의 갑신정변 때 달성되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갑신정변의 혁신정강은 한국역사에서 최초로 정부가 양반신분제도와 문벌을 폐지하고 국민평등권리와 제도를 제정할 것을 공포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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