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Ⅴ. 갑신정변
  • 3. 갑신정변의 전개
  • 3) 개화정권의 수립
  • (3) 개화파 신정부의 혁신정강 공포
  • 라. 재정의 통일과 경제개혁의 단행

라. 재정의 통일과 경제개혁의 단행

갑신정변의 혁신정강 제12조 ‘모든 국가재정은 호조로 하여금 관할케 하며 그 밖의 일체의 재무관청은 폐지할 것’과, 제3조 ‘전국의 地租法을 개혁하여 간사한 관리들을 근절하고 백성의 곤란을 구하며 겸하여 국가재정을 유족케 할 것’과, 제6조 ‘각 도의 還上制度는 영구히 폐지할 것’과, 제9조 ‘惠商公局을 폐지할 것’ 등은, ① 재정의 호조로의 통일, ② 지세제도 개혁을 비롯한 조세제도의 개혁, ③ 환자(환곡)제도의 폐지, ④ 보부상 등 전근대적 특권상업제도의 폐지 등을 통하여 근대적 자유산업을 장려하고 재정제도와 경제제도를 근대적 방향으로 개혁하려 하였다.

당시 국가재정은 재무부처로 통일되어 체계적으로 관장되지 못하고 모든 정부부서들이 각각 조세징수권을 가져 직접 국민들로부터 조세를 징수해서 각각 자의로 지출하고 있었다. 따라서 통일된 국가재정의 예산·결산제도도 없었다. 이 때문에 각 관청에 의한 과도한 조세징수와 중간착복, 재정의 낭비와 문란이 극도에 달해 있었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당은 정변 개시 이전부터 이러한 국가재정의 문란실태를 통탄하고 ‘戶曹’에 의한 국가재정의 통일과 예산제도의 확립 실시를 이미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가,880)≪尹致昊日記≫, 1883년 10월 3일. 정변을 일으키자 바로 국가재정의 통일을 정강으로 공포한 것이었다.

갑신정변 당시의 개화당의 국가재정 개혁의 기본방향은, ① 모든 국가재정의 호조(재무부)로의 통일, ② 호조 이외의 모든 재무관청의 폐지, ③ 예산(및 결산)제도의 실시, ④ 세입과 세출의 단일화 및 균형체계 수립, ⑤ 조세제도의 개혁, ⑥ 내외 公債모집에 의한 재정자금 부족분의 긴급 조달 등이 그 핵심을 이루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가재정의 호조로의 통일이 선행적으로 즉각 실시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강조하였다.

혁신정강 내용 중의 지세법의 개혁은 당시 三政(田政·軍政·還政)의 문란 중에서 전정(지세제도)과 군정(군포세제도)의 문란을 교정하고 근대적 조세제도를 수립하기 위한 개혁정책으로 선포된 것이었다. 개화당은 지세제도와 조세제도를 근대적으로 개혁하여 세율을 내려서 법제화하고 탐관오리들의 중간착취와 부정을 철저히 제거함으로써, 한편으로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켜 백성을 고난에서 구함과 동시에 간사한 관리들의 중간수취를 근원부터 제거함으로써 겸하여 국가재정을 유족하게 만들려고 한 것이었다.

한편 혁신정강 가운데 하나인 還上制度의 폐지는 종래의 삼정의 문란 중에서 환정의 문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아예 이 제도를 영구히 폐지하기로 한 것이었다. 원래 환자제도는 흉년과 백성들의 식량위기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설된 복지제도의 일종이었으나, 조선 후기부터는 백성들을 착취하는 관영 고리대부제도로 완전히 변질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매우 컸으며, 관리들의 부정착취의 온상이 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환자제도의 폐지를 요구하고 있었다. 1862년 ‘진주민란’의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도 바로 환자제도의 문란이었다. 그러나 당시 민비 수구파들은 환자제도에 의거하여 재정수입의 일부를 충당하고 사복도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폐해 많은 이 환자제도를 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은 백성들의 오랜 소망과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여 착취제도로 변질한 환자제도를 영구히 폐지할 것을 혁신정강에서 과감하게 선포한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참으로 획기적인 개혁이었다.

혁신정강 중의 혜상공국의 폐지는 ‘보부상’을 비롯한 전근대적 특권상업제도의 폐지를 선포한 것이었다. 민비 수구파들은 종래의 특권행상들인 보부상들을 1883년 8월에 ‘혜상공국’이라는 이름으로 재조직하여, 혜상공국 당상에 민비 수구파의 영수 閔台鎬 등을 임명해서 보부상들의 전근대적 상업독점권을 오히려 강화시켜 줌과 동시에 전국의 보부상들을 민비 수구파의 정치폭력세력으로 이용하려 하였다. 이것은 당시 자유상업의 급속한 발흥추세와 정면으로 대립되는 시대역행적 정책이었다.

개화당들은 당시 자유상업과 ‘회사’형태의 자본주의적 자유기업의 설립을 장려하여 공업·철도·기선·토지 등 근대적 산업을 일으킬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881)≪漢城旬報≫3호, 1883년 10월 21일,<會社說>. 김옥균도 근대적 공업의 건설을 강조하고, 광업의 개발을 주장했으며, 기선 및 철도에 의한 근대적 운수와 電線에 의한 근대적 통신제도의 설치를 주장하였다.882) 金玉均,<治道略論>(全集, 13쪽 및 4쪽). 당시 개화당의 적극적 성원과 보호에 힘입어 1883년부터 갑신정변 직전인 1884년 11월 말까지 약 2년간에 조선왕국에서 설립된 상공업회사가 26개에 달하였다.883) 愼鏞廈,<初期開化政策>(≪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16, 1975), 383∼392쪽.

갑신정변의 혁신정강은 혜상공국을 폐지하여 한편으로 보부상제도 등 전근대적 특권상업제도를 폐지하면서 보부상들이 민비 수구파세력의 폭력조직이 되는 것을 차단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적 회사형태의 자유상업과 기업들을 육성하는 조건을 만들려고 한 것이었다. 이것은 갑신정변 이후 신정부의 경제개혁 방향이 전근대적 경제조직을 정책적으로 해체시키고 근대 자본주의적 산업경제를 건설하려는 방향임을 나타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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