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의 혁신정강 제11조 ‘4營을 합하여 1영으로 만들고,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시급히 설치할 것(육군대장에는 왕세자를 추대할 것)’은 군사제도의 근대적 개혁을 추구한 것이었다.
당시 군사제도는 친군영을 전·후·좌·우의 4영으로 나누어 민비 수구파의 거물들이 지휘하고 있었으며, 국방보다는 왕실 호위의 임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 친군영 전영과 후영은 서양식 군사훈련을 시키고 있었고, 친군영 좌영과 우영은 袁世凱가 설치하여 청국식 군사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그 결과 한 나라의 군대가 부대에 따라 훈련방법과 편제가 서로 달랐다. 또한 친군영 전영과 친군영 좌·우영은 사사건건 대립과 갈등을 일으켜 혼란과 근심을 자아내고 있었다.884)≪尹致昊日記≫, 1883년 12월 4일.
개화당들은 이 때문에 갑신정변 이전부터 기회있을 때마다 4영의 1영으로의 통합과 하나의 통일된 방식에 의한 전체 부대들의 군사훈련 및 편제를 주장했었다.885)≪尹致昊日記≫, 1883년 12월 21일. 당시 김옥균 등 개화당은 열강이 침략해 들어오는 추세 속에서 조선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방위하기 위한 자주적 근대군대의 양성을 매우 강조하였다.
개화당은 먼저 영민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외국의 신식 무관학교에 유학시켜 현대적 사관교육을 받도록 해서 귀국시킨 다음, 그들을 교관으로 한 ‘士官學校’를 설립하여 신식 장교들을 체계적으로 양성하고, 그에 기초하여 대규모의 근대적 ‘육군’을 정예군대로서 양성하려고 계획하였다. 이미 일본에 들어와 있는 서양식 현대적 사관교육을 받아 오도록 일본에 파견되었던 서재필은 이 때를 회고하여, “하루는 김옥균이 나에게 국방을 충실히 하려면 정예한 군대밖에 없는데, 현하 우리의 급무로 그 위에 나올 것이 무엇이냐고 하며 일본으로 건너가 무예를 배우라고 권하였다. 나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승낙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15인의 다른 학생들과 일본으로 향하였다”886) 徐載弼,<回顧甲申政變>(앞의 책), 84쪽.고 기록하였다.
김옥균 등 개화당들은 그들이 외국에 유학시킨 14명의 사관생도들이 졸업하고 귀국하자 이들을 중심으로 사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887)≪尹致昊日記≫, 1884년 6월 19일. 또한 개화당은 방대한 규모의 신식(서양식) 육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서양으로부터 ‘군함’을 도입하여 신식 ‘해군’도 창설하려고 하였다. 개화당의 신문인≪한성순보≫가 거의 매호마다 세계 각국의 육군과 해군의 병력과 군사동태를 상세히 소개하고 해설한 사실에서도 그들이 근대적 국방과 근대적 신식 군대의 양성에 예민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갑신정변의 혁신정강에서 ① 4영의 1영으로의 통합, ② 국방을 담당하는 육군과 왕실 호위를 담당하는 근위대의 분리, ③ 근위대의 시급한 설치를 공포한 것은 군사제도를 근대적으로 개혁한 최초의 것을 정강화한 것이었고, 사실은 군사 전반의 근대적 대개혁을 추구한 것이었다. 근위대의 육군대장에 왕세자(당시 유아)를 추대한 것은 군주국가에서 의례에 불과한 것이었고, 그들이 실제로 추구한 것은 신식 장교가 지휘하는 강력한 정예의 신식 육군과 해군이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