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Ⅰ. 근대 언론활동
  • 2. 근대 언론의 발달
  • 4) 일간지 ≪일신문≫
  • (3) 기사의 외교문제화

(3) 기사의 외교문제화

≪일신문≫은 외세에 저항하는 한국신문의 전통을 확립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자유와 개화를 열렬히 주장한≪일신문≫의 논조는 외세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가장 큰 파문을 일으켰던 것은 5월 16일자(제32호) 1면에 러시아와 프랑스가 이권을 요구한 외교문서를 폭로하여 문제가 된 사건이었다.

폭로한 내용은 러시아가 목포와 진남포의 조계지를 근방 4방으로 10리를 사겠다고 요구한 것과, 프랑스는 평양의 석탄광 하나를 채굴하여 경의선 철도부설에 사용하겠다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이미 1896년 6월에 경의선 철도부설권을 얻어 가지고 있었다.≪일신문≫이 러시아와 프랑스의 이권요구를 폭로한 같은 날짜에 일인들이 발행하던≪한성신보≫도 동일한 기사를 실었는데, 이는≪일신문≫과 속셈은 달랐지만 일본측으로서도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신문의 기사는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독립협회는 외부에 대해 사실의 전말을 밝히라고 요구하고, 이에 대한 정부의 대책이 무엇인지를 따져 묻는 질의서를 외부대신에게 보내면서 본국의 땅은 선왕의 강토요 인민의 생업하는 땅인데 귀 대신의 고명하신 식견으로 마땅히 참작하야 판단하실 터이오나 본회에서도 이 일에 대하야 부득불 참예해야겠다고 선언하였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요구가 세상에 알려지고 이를 저지하려는 반대여론이 비등하자, 은밀히 일을 성취하려 했던 두 나라 공사관에서는 즉시 외부에 항의문을 보내왔다.

러시아공사 마튜닌(Nikolai Matyunin)은 문제된≪일신문≫과≪한성신보≫를 첨부하여 한국정부에 보내면서 외교기밀이 누설된 경위를 추궁하고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요구했으며, 프랑스공사 플랑시(V. Collin de Plancy)도 항의와 함께 관련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러시아공사는 문제가 된≪일신문≫ 5월 16일자 기사만이 아니라 5월 7일자와 11일자 기사에도 고의로 러시아군인의 명예를 훼손한 내용이 있으며, 교섭중인 외교기밀을 신문이 누설하였다는 것 등을 이유로 항의한 것이다. 프랑스측도 외교기밀의 누설을 항의하였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항의는 5월 16일에 시작되어 6월 20일까지 계속되었다.

열강세력과 정부가 압력을 가하는 가운데≪일신문≫은 굽히지 않았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항의가 한창이었던 5월 19일자 논설은 “어떤 사람은 저희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몇 만리 타국에 와서 체면 불구하고 남의 토지를 얻어다가 저희 국기 밑에 속한 배 되게 하려 하며, 어떤 사람은 국은을 입어 벼슬을 하면서 인심 좋게 남의 청을 잘 들어 말로라도 허락을 하려 하였는지, 사람의 경계와 의리는 다 마치 한가지언마는 이 같이 등분이 있다”고 개탄하면서, 국가와 이익을 지키지 못하는 한국 대신들도 공격하였다.

한편 협성회는 5월 23일과 25일 특별회를 열고 프랑스공사가≪일신문≫ 기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한 사실을 규탄하였다. 협성회는 양홍묵 등 5명을 총대위원으로 뽑아 만일≪일신문≫기재원이 현저한 죄과가 있다면 依律懲治하고, 죄과가 없으면 죄 없는 이유를 프랑스공사에게 밝혀 양국 교제상 체례에 서로 손상됨이 없게 하라는 편지를 외부대신 조병식에게 보냈다. 열강의 언론에 대한 통제 요구는 집요해서 이 해 10월 7일에는 주한일본공사 카토(加藤增雄)까지 가세하여 주한외교사절단의 대표 자격으로 신문의 외교문서 게재를 금지시키라고 강요하였다.034)≪舊韓國外交文書≫4, 日案 4, 149∼150쪽.

열강 공사들의 압력에 견디지 못한 외부는 마침내 신문을 규제할 법률제정을 서두르게 되었다. 처음에는 외부가 한성부에 법률제정을 의뢰해 보았으나 한성부가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외부가 직접 이를 제정하기로 작정하였는데, 바로 이 무렵인 1898년 10월 30일 고종이 내린 5개 항의 詔勅 가운데 내부와 농상공부가 각국의 예를 본떠 신문조례를 제정하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으므로 내부가 이 일을 맡게 되었다.

이리하여 내부는 일본의<신문지조례>를 모방하여 1899년 1월 전문 33조로 된<신문조례>를 만들었으나 신문에 대해 가혹한 규제조항이 너무 많다는 언론계의 반발로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결국 최초의<신문지법>은 이보다 8년 뒤인 1907년에 제정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