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每日新報≫는 1904년 7월 18일자로 국문으로 창간되었다. 영국인 베델이 사장이었고, 梁起鐸이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그 간행에는 황실의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우세한 시기로 국내에 설치된 일본의 경무고문부에서 한국인 발행의 신문에 대한 사전검열이 준비되고 있었다. 황실에서 자금을 지원하며 외국인을 내세워 신문을 발행하고자 하였던 것은 바로 그러한 현실을 고려한 것이었다.
≪대한매일신보≫가 국문으로 발행된 것은 하층민의 계몽이 시급한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인데, 더욱이 한 면은 영문판으로 구성되어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편집은 크게 유용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평가되었다. 따라서 신문사에서는 먼저 전통적인 지배층이고 지식층인 유학자계층의 계몽을 전제로 하여 신문을 국한문판으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다. 1905년 3월 10일자를 발행한 이후 5개월을 휴간한 것은 바로 그 준비 때문이었고, 드디어 그 해 8월 11일자부터≪대한매일신보≫는 국한문체로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영문판≪The Korea Daily News≫는 따로 발행하였으며, 하층민의 계몽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어 1907년 5월 국문판을 별도로 간행하게 된다.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을 발행인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와 정부의 신문탄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따라서 일제의 국권침탈과, 친일정권의 무능과 부패를 거리낌없이 비판하였다. 통감 伊藤博文이 1907년 초 일본에서 행한 다음과 같은 연설이 있다.
…現今 한國에셔 發行 一외國人의 每日報 確證이 有 日本의 졔般惡政을 反對야 한人을 煽動이 連續不絶 此에 關 機會에 就야 統監이 難可受責이로다…(≪大韓每日申報≫, 1907년 2월 12일 잡보<伊藤演說>).
≪대한매일신보≫가 가장 반일적인 신문이라고 지적할 만큼, 일제의 한국침탈을 비판해 왔던 것이다. 일제가 베델의 추방작업을 1906년 7월부터 시작하였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특히≪대한매일신보≫는 의병활동에 대해서 다른 신문들에 비하여 매우 호의적이었다.≪황성신문≫이나≪제국신문≫은 의병투쟁이 국권회복을 위하여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유에서 매우 비판적이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입장이었다.
신문사는 양기탁의 책임하에 운영되었는데, 특히 申采浩·張道斌 등이 논설기자로 활동하였다. 그 밖에 林蚩正·玉觀彬·薛泰熙·卞一·姜文秀·李交倓·李章薰·黃羲性·兪致兼·金演昶 등도 신문사에 재직하였다. 그 발행부수는 한말 발행되던 신문 가운데에서는 가장 많아 1908년 5월 일제측의 조사에서도 국한문판이 8,143부, 국문판이 4,650부, 영문판이 463부로 모두 13,256부로 나타났다. 또 1908년 8월의 조사에서는≪대한매일신보≫의 국한문판과 국문판의 발행부수가≪제국신문≫·≪황성신문≫·≪국민신보≫·≪대한신문≫의 합계와 비슷하였다.
통감부는≪대한매일신보≫의 국권회복 활동을 방해하기 위한 베델의 추방을 계속 추구하였다. 결국 베델은 1908년 6월 영국 고등법원에서 3주간의 禁錮와 보증금의 납부라는 판결을 받아 상해로 가서 금고형을 치렀다. 베델은 이 일로 건강이 악화되어 1909년 5월 사망하고 만다. 또 통감부는 1908년 7월 양기탁을 국채보상금의 횡령혐의로 구속하였지만, 영국정부의 항의로 9월에 석방되었다. 베델은 1908년 5월부터 그의 비서 맨함(萬咸, A. Marnham)에게 그 경영을 맡겼으나, 그는 베델이 죽은 후 통감부의 회유로 1910년 6월 신문사를 이장훈에게 인계하고 말았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이 되자≪대한매일신보≫는 총독부의 기관지≪每日新報≫로 제호가 바뀌어 계속 간행되었다.049)≪大韓每日申報≫에 관해서는 李光麟,<≪大韓每日申報≫刊行에 대한 一考察>(≪韓國開化史의 諸問題≫, 一潮閣, 1986)와 鄭晉錫,≪大韓每日申報≫와 裵說≫(나남, 1987)을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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