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Ⅰ. 근대 언론활동
  • 3. 언론의 구국투쟁
  • 1) 한말 언론과 계몽운동
  • (1) 국내신문
  • 라.≪만세보≫·≪경향신문≫·≪대한민보≫·≪경남일보≫

라.≪만세보≫·≪경향신문≫·≪대한민보≫·≪경남일보≫

≪萬歲報≫는 1906년 6월 17일자로 창간되었는데, 천도교에서 발행한 것이었다. 그 해 1월 일본에서 체류하다가 귀국한 천도교 교주 孫秉熙와 문명개화에 관심을 두고 있던 그의 측근 權東鎭·吳世昌 등이 국내 기반의 확대와 천도교에 대한 국민의 부정적 시각을 변화시키는 것이 그 발간 목적이었다. 주필 李人稙의 명의로 내부에 제출한 신문발간 청원서에는 “國民의 風化를 鼓發며 智識을 補導기 爲야” 신문사를 설립한다고 하였다.050)≪萬歲報≫ 상(亞細亞文化社 영인본, 1985) 수록문서. 천도교에서는 국민계몽을 내걸고 교육사업과 출판사업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국한문으로 발행된 이 신문은 한자 옆에 루비활자를 달아 국문밖에 알지 못하는 계층도 독자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천도교는 1906년 8·9월경 政敎分離를 내걸고 일진회와 대립하여 결별하게 되는데, 이후 교회의 재정이 어려워져 신문사도 재정난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1907년 6월 30일자의 호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고 만다. 이 신문사는 정부에 매각되었고, 친일 李完用내각은 그 해 7월 18일자로 기관지≪大韓新聞≫을 발간하였다. 그 사장에는 만세보사의 주필이던 이인직이 취임하였다.≪만세보≫는 천도교에서 발간한 만큼 드러나지 않게 교회의 홍보기능을 하였으며, 천도교 교리서도 자주 연재하였다. 대략 2,000부를 발행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이 신문은 실력양성론에 입각하여 지식계발과 풍속개량에 관심을 두고 있었으며,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는 불간섭의 입장을 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051)≪萬歲報≫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에는 崔起榮,<天道敎의 國民啓蒙活動과≪萬歲報≫의 發刊>(앞의 책, 1991)가 참고된다.

천주교회에서도≪京鄕新聞≫을 1906년 10월 19일자로 창간하였다. 순 국문의 주간지였던 이 신문은 국민계몽과 아울러, 천주교인의 권익보호, 그리고 교회 자체의 기관지의 필요성에서 발간되었던 것 같다. 또한 개신교회의 교세 확장과 신문 발간에 대한 대응이라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그 형태는 순수한 종교신문이 아닌 일반 시사신문이었다. 따라서 비신자들을 독자층으로 인식하여 교세 확장을 기대하기도 하였다. 그 제작에는 드망즈(F. Demange)신부와 金元永신부가 관여하였고, 李建洙가 실무책임자였다. 외국인 신부가 책임자로 임명된 것은≪대한매일신보≫와 마찬가지로 외국인 명의의 신문은 통감부의 사전검열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의 예산으로 발간되었으므로 재정은 풍족하였고, 발행부수도 4,000∼5,000부에 이르렀다.

≪경향신문≫은 정교분리의 원칙에 의하여 정치불간섭주의를 내세워, 현실정치에는 소극적으로 대처하였고 일본의 한국지배를 인정하는 현실수긍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실정법을 중시하였으나 정치적인 법령에는 무관심하고 주로 민생에 관련된 부분을 강조하였다. 정신적인 개화와 교육을 중시하였으며, 호교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개신교 선교사를 많이 파견한 미국에 비우호적이었다. 그 폐간은 ‘한일합병’ 이후 총독부의 강요로 일반 시사신문으로의 발행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며, 이후≪경향잡지≫라는 순수종교잡지로 전환하고 말았다.052)≪京鄕新聞≫에 관해서는 崔起榮,<天主敎會의≪京鄕新聞≫ 刊行>(위의 책)을 참조할 것.

≪大韓民報≫는 대한협회의 기관지로 발행된 것이었다. 1907년 11월 尹孝定·장지연 등에 의하여 발기된 대한협회는 1908년 4월부터 1909년 3월까지 모두 12회에 걸쳐≪大韓協會月報≫라는 기관지를 발행하다가, 1909년 6월 2일자로≪대한민보≫를 창간하였다. 국민의 사상을 통일하고 국민의 행동을 일치하게 하여 자강으로 국운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을 신문 발간의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대한협회는 일간지를 발행하기 위해 이미 1909년 초부터 계획하여, 재정적으로 어려웠던≪제국신문≫을 매수하려고 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자 별도로 신문을 창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대한민보≫역시 창간 이후 재정부족으로 말미암아 곤란을 받았으면서도, 한때 발행부수가 6,200부나 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장은 오세창이 맡았으며, 장효근·崔榮穆·李鍾麟 등 천도교인들이 신문사에 관여하였다. 특히≪대한민보≫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1면 중앙에 게재되었던 삽화였다. 주로 이완용내각과 일진회를 풍자하거나 우국충정을 보이는 계몽적인 것이었다. 그 당시 화가로 이름 높던 李道榮이 담당하고 있었다.053)金項勼,≪大韓協會(1907∼1910)硏究≫(檀國大 博士學位論文, 1992), 162∼180쪽.

한말 유일한 지방신문으로 晉州에서 발행되던≪慶南日報≫가 있었다. 이 신문은 가장 문명개화가 늦었다고 평가받던 경남지역의 유지들이 출자하여 설립한 것이었다. 그 주도적인 인물은 金弘祚·金榮鎭·金琪邰 등이 있었고, 경남관찰사 黃鐵도 크게 지원하였다. 주필에는 황성신문사장을 역임한 장지연이 초빙되었는데, 직접 신문제작에 관여한 인물들은 주로 하급관리를 역임한 경남의 지주와 자산가들이었다.

1909년 10월 15일자로 창간된 국한문의≪경남일보≫는 국민계몽이 양반·유림층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2,000부 정도가 발행되었으나, 재정적으로는 어려웠다. 그 주된 관심은 실업장려와 민지개발이었는데, 특히 정치문제에는 간섭하지 않을 것을 천명한 바 있었다. 따라서 그 내용도 국가의 위기에는 무관심하고 오히려 친일적인 경향까지 보이고 있었다. 또 지방신문으로의 역할을 중시하였으며, 유교적인 입장이 강조되었다. 1910년 8월 이후≪대한매일신보≫가 총독부 기관지인≪매일신보≫로 개제되고 중앙의 나머지 신문들이 모두 폐간되었지만,≪경남일보≫만은 폐간되지 않았다. 대신 사설이 없어지고 사전검열을 계속 받았다. 본래 일간으로 출발하고자 하였으나 실제로는 격일간으로 발행되었다.054)≪慶南日報≫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은 崔起榮,<晉州의≪慶南日報≫:唯一의 地方紙>(앞의 책, 1991)에서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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