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교포신문으로 처음 발행되었던 것은 하와이에서 1904년 3월 27일자로 창간된≪신죠신문≫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1902년 12월에 하와이로의 노동이민이 시작된 이래, 하와이에 형성된 한인사회를 대상으로 격주간의≪신죠신문≫ 등이 발간되었던 것이다. 미주 본토에서는 1905년 4월에 교포단체로 샌프란시스코에서 共立協會가 조직되었는데, 그 기관지≪共立新報≫가 그 해 11월 22일자로 창간되었다. 교포신문의 특징은 모두 국문으로 발행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활자문제를 포함하여 이민자들의 교육정도와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교포신문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이민한 교포들의 계몽과, 거주국에서의 권익신장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동시에 일제에 의하여 국권을 침탈당하던 고국의 정치적 현실에 대한 논의도 빠뜨리지 않았다. 특히 이들 교포신문은 국내에도 유입되었는데, 검열을 받지 않았으므로 일제의 국권침탈의 부당성과 국권회복론 등 강렬한 항일논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1908년 4월의 신문지법 개정이 바로 이들 교포지에 대한 압수도 목적으로 하고 있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실제로 1908년과 1909년의 경우, 교포신문들은 175회의 압수처분에 의하여 약 18,000부가 압수되었던 것으로 일제가 조사한 바 있었다.056)崔起榮,<光武新聞紙法 硏究>(앞의 책, 1991), 285∼288쪽. 교포신문의 발행은 대부분 교육을 받거나 유학을 목적으로 이주한 인물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만 교포신문의 재정은 매우 취약하였는데, 미주의 경우에는 교포들의 의연이, 러시아령의 경우에는 유력교포의 출자가 주된 수입원이었다.
≪공립신보≫와 그것을 계승한≪新韓民報≫에 관해서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공립신보≫의 창간사에 의하면 교포사회에서의 애국심 고양과 계몽, 그리고 본국과 교포사회의 실상을 알려 서로 깨닫게 한다는 목표를 확인할 수 있다. 즉 교포사회의 계도와 본국과의 연계를 신문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였던 것이다. 초기의 교포신문들은 石版 또는 등사판으로 발행되다가 활판으로 바뀌었다.≪공립신보≫의 경우, 석판과 등사판으로 30호가 발행된 뒤, 1907년 4월 26일자부터 활판으로 발간되어 1909년 1월 27일자까지 총 118호가 발행되었다.
1909년 2월 1일 하와이의 교포단체인 韓人合成協會와 공립협회가 國民會로 통합되었다. 각 기관지였던≪공립신보≫와≪합셩신보≫가≪신한민보≫와≪新韓國報≫로 개제되었다. 또 1910년 2월 10일 국민회는 大同保國會와 통합하여 大韓人國民會로 확대되었는데,≪신한민보≫가 역시 그 기관지였다. 대동보국회에서도≪大同公報≫라는 주간지를 발간한 바 있었다. 교포신문들의 재정은 매우 빈약하였지만, 교포단체의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인식되었으며 교포들의 성원과 지원으로 재정부족을 겨우 메워 나가면서도 신문을 발행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일본의 국권침탈과 식민정책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교포들의 권익향상을 위하여 진력한 미주의 대표적인 단체였다. 그러므로,≪신한민보≫의 논조도 반일적이면서 교포의 지위향상을 위한 것이었고, 민족 전체의 대표기관으로 자임하였다. 주로 주간 4면으로 발행되었던≪신한민보≫는 1910년 국권침탈 이전에는 국내에도 유입되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나 이후 국내유입은 불가능하였고, 하와이·멕시코·遠東 등지에는 배포되었다. 1910년 현재 3,000부를 간행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발간비용의 상당부분을 교포들의 기부금에 의존하고 있었다. 편집은 崔正益·鄭在寬·李恒愚·姜永大 등 공립협회나 국민회의 간부진이 담당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국문의 세로쓰기로 간행되었고, 논설을 비롯하여 대한인국민회 관련사항, 국내와 재미교포 및 원동 등지의 교포에 관한 소식, 그리고 소설이나 번역·투고 등이 실렸다.057)≪共立新報≫와≪新韓民報≫에 관해서는 崔起榮,<美洲僑胞의 反日言論:≪共立新報≫·≪新韓民報≫의 刊行>(앞의 책) 참조.
1910년 대한인국민회로 합류할 때까지 공립협회와 대립하고 있던 대동보국회에서도≪大同公報≫를 주간으로 발간하였다. 1907년 10월 3일자로 창간된 이 신문은 7호까지 석판으로 발행되다가, 이후 활판으로 1908년 4월 9일자까지 모두 25호가 발행되었다. 신문 발간에 관여한 文讓穆·崔雲伯·白一圭·李學鉉 등은 모두 대동보국회의 임원들이었다. 이 신문은 재정난으로 폐간되었는데, 발행부수도 2,000부가 되지 않았다.≪대동공보≫는 그 사명을 保國에 두고 있다고 하였는데, 군주 중심의 국권회복을 지향한 것으로 짐작된다. 신문에도 본국의 의병에 관한 보도가 빠지지 않았고, 교포와 대동보국회에 관한 기사가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대동공보≫는 그 발행기간이 6개월에 지나지 않아 그 영향력이 크지는 않았다.058)崔起榮,<美洲 大同保國會의 국권회복운동>(앞의 책, 1997), 250∼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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