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1. 유교
  • 2) 한말과 일제강점기 한국의 유교개혁사상
  • (1) 도학파의 유교개혁사상
  • 다. 이승희의 공교운동

다. 이승희의 공교운동

도학적 유교개혁사상가의 대표적 인물로 李承熙(韓溪, 1847∼1916)의 공교운동과 유교개혁사상이 지닌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승희는 心卽理說을 주창한 한말 영남도학의 거장인 李震相(寒洲)의 아들로서, 그 자신도 비중이 큰 도학자이다. 1880년 그는 청나라의 鄭觀應이 지은≪易言≫을 읽고서, “예수의 앞잡이고 맹자의 죄인이다”라고 비판할 만큼, 개화사상에 거부적인 정통도학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 후 그는 일제의 압박을 피하여 1908년 62세의 노년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으며, 이듬해 1909년 만주로 옮겨가서 興凱湖 부근의 密山府 땅에 ‘대한을 부흥시킨다’는 뜻으로 韓興洞을 세워 동포들을 유교정신으로 결속시키기 위해 활동하였다. 여기서 그는<日則銘>과<日誦五綱>및<五綱十目>을 정하여 기도문처럼 날마다 성찰하고 암송하게 함으로써, 유교인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 윤리강령과 실천조목을 제시하였다.

그는 1913년 67세의 노인이었으나, 당시 북경에 공교회가 조직되어 있음을 알고는 만주지역(東三省) 한국인 동포들을 결속하는 방법으로 ‘동삼성 한인 孔敎會’를 설치하기로 결의하였다. 곧 각지로 통문을 돌리며,<동삼성한인공교회취지서>와 절목 10조를 제정한다. 康有爲와 陳煥章이 이끄는 공교회의 조직은 자신이 탐색해 오던 유교조직화의 추구에 해답을 제공했던 것으로 보인다.107)李承熙,≪韓溪遺稿≫ 6, 東三省韓人孔敎會趣旨書(국사편찬위원회, 1979, 263∼265쪽).

이승희는 공교가 중화의 존망에 결정적 요소요, 교육은 공교의 존망에 결정적 조건임을 지적하고 다른 종교에 적응하는 의존적 방법이 아니라, 진실성과 분별 및 믿음과 실천을 통한 공교의 독자성과 내면적 심화를 추구하였다.

그는 공자의 도를 “천명의 성품에 근원하며, 인도의 경전을 수립한다”라 하여 천명과 인도의 두 축을 기준으로 정의하고, 공자를 “중화의 마음이요 만세의 마음이라” 하여 중화의 문화와 만세의 영원한 역사가 공자 없이는 생명을 잃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108)李承熙,≪韓溪遺稿≫ 6, 孔道會講說(362∼364쪽).

또한 공교에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음을 강조하여 국가와 교가 멸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자를 통합하고 新學과 舊學(공교)을 통합해야 한다고 역설한다.109)李承熙, 위와 같음(388∼390쪽). 만약에 끝내 양자가 소통되지 않는다면, 孔廟와 학당에서라도 공교학과를 설립하여 공교가 현시대의 응용을 겸하고 있음을 밝힐 것을 주장하고 있다.110)위와 같음. 공교가 공식 교육기구로부터 유리되는 것이 공교의 존립에서는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를 예리하게 통찰하여 정교일치론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한 마디로 그의 공교사상과 유교개혁론은 도학적 전통의 내면에서 성장되어 나온 것으로 강유위의 공교사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서로 맺어질 수 있는 사상 내적인 독특한 요인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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