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Ⅲ. 근대 과학기술
  • 2. 근대 과학기술의 도입
  • 4) 근대 산업기술
  • (3) 대한제국시기 방직기술의 이식
  • 가. 서양식 방직공장의 설립과 방직기계의 도입

가. 서양식 방직공장의 설립과 방직기계의 도입

조선 후기의 면직물업은 독자적인 발전을 계속하여 개항 이후 청일전쟁 이전까지는 외국산의 면직물에 대항할 수 있었으나, 1895년 이후 면직물시장을 일본산에 탈취당하기 시작하면서, 서양식으로 직조기를 개량한 인물들(李仁基·李泰浩 등)이 등장하기도 하고,550)≪皇城新聞≫, 1900년 2월 20일, 1902년 12월 23일. 대조선저마제사회사(1897)·종로직조사551)1900년도에 설립된 종로직조사의 직기도 대당 하루 생산량이 70척으로 한성제직회사와 비슷한 종류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 공장은 종로의 白木廛이 주동이 되어 당시의 거물관리(민병석·이근호)를 사장 및 부사장직에 추대하였다 (≪皇城新聞≫, 1900년 5월 7일).(1900)·한성제직회사(1901) 등의 민간 직조회사들이 설립되었다.552)권태억, 앞의 글, 165쪽. 대한제국시기에 설립 또는 설립이 추진된 방직관련 공장 또는 회사들을 정리하면 다음<표 3>과 같다.

연대 명 칭 설립자 또는
주무자
생산품목 직기의 특징 비 고
1897 대조선저마제사
회사
안동수·서재필
삼·모시의 실 내외국인
합작
대한직조공장 안동수 설립 추진
1898 직조권업장 김익승 설립 시도
1899 한상방적고본
회사
정섭조·이헌규·
김창한
絹絲(?) 경영 미확인
1900 한성직조학교 박제순(교장) 개량직기  
(알려지지 않음) 정긍조  
(알려지지 않음) 이인영 직기제조 곧 폐업
(알려지지 않음) 이인기 紈緞紬羅, 직기 곧 폐업
예동직조단포(주) 민병석·이근호·
이봉호
주단·포목 기계를 사옴  
종로직조사 민병석·이근호 대당 하루 70척  
남죽동조직소 錦綾목포·표백·
염색
견습생 모집
1901 한성제직회사 정동식 면포·木倭繒 소폭직기 50대
광폭직기 10대
대당 하루 70척
발동기 이용
폐업됨
1902 중곡염직공소 김덕창 필목·모자·양말  
1906 (알려지지 않음) 박승직 포목 등    
순창호 홍순강 綢緞·紗屬 목제직기  
1908 미동직조회사   緞屬    
1910 경성직뉴합명
회사
이정규·김성기·
박윤근
요대·단임 등 동력 이용  

<표 3>대한제국시기 설립(추진 포함)된 방직관련 공장 또는 회사들

전거:권태억 1980,<한말·일제 초기 서울지방의 직물업>(≪韓國文化≫1, 155∼156쪽 자료 재구성.

<표 3>에서 알 수 있듯이 1897년부터 1900년까지의 방직회사들은 설립이 시도·추진되었거나 폐업되었으며, 직기의 종류나 특징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표 3>에서 주목되는 회사는 한성제직회사이다. 국내에서 최초로 역직기를 도입했다고 알려진 한성제직회사(설립자 정동식)는 소폭직기 50대와 광폭직기 10대를 갖추었는데, 이들 직기는 ‘人力을 費하지 아니하고’,553)≪皇城新聞≫, 1901년 5월 13일. ‘一切 織機를 機關으로써 轉輪’하는 발동기로 여겨진다.554)≪皇城新聞≫, 1901년 3월 29일. 이들 역직기의 대당 하루 생산능력은 70∼80척이고, 숙련된 자는 동시에 2∼3대를 운영할 수 있었으며, 생산품목은 綿布·木倭繒의 면직물이었다555)권태억, 앞의 글, 165쪽.고 한다. 그런데, 근대 이후 직기는 대략 재래의 직기(hand loom)556)재래식 직기는 구조가 간단하여 배튼(batten, 飛抒裝置)을 장치할 수 없어 제직 생산고가 낮고, 평직 이외의 변화직포(綾·繻子織·紋織)를 짤 수 없는 약점이 있다. 그러나 반면 經絲 등에 무리한 장력을 주지 않아 絹·綿·麻織 어디에나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재래의 직기(投梭機)는 하루에 대략 10야드(≒9.14m)를 짤 수 있는데, 배튼장치로 개량한 織機(배튼기)는 재래의 직기에 비하여 2배 정도, 족답기는 3∼4배의 생산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권태억, 위의 글, 145∼162쪽).에서 배튼(batten)기(flying shuttle)557)배튼기는 1733년 영국의 죤케이(Kay, John, 1704∼64?)가 발명한 나르는북(飛杼)장치이다. 이것은 종래 양손으로 북을 던져서 가로실(緯糸)을 통과시키던 동작을 북에 붙은 끈(紐)을 당기면 滑車에 의해서 북이 움직여 좌우운동을 반복하는 장치이다. 배튼은 바디(筬)의 양쪽에 부속된 북상자(杼箱)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배튼에 따라 북을 던지는 한쪽 손이 개방되어 다른 손으로 바디를 칠 수 있기 때문에 제직 능률이 거의 두 배로 되어 폭이 넓은 직물을 짤 수 있었고, 제직 동작에 숙련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어 균일한 천을 짤 수 있었다. 1877년에 일본 전역으로 보급되었으며 木棉·絹 어느 섬유를 다루는 곳에서도 여러 가지 개량장치가 시도되어, 발명특허법이 시작한 1885년부터 1907년까지 개량배튼·다층북배튼 등의 명칭으로 특허 신청된 직기가 36건을 넘었다고 한다(角山幸洋,<日本の織機>,≪日本技術の社會史≫3 紡織, 日本評論社, 1983, 297∼298쪽).
배튼(batten:직기에서 바디의 기능을 조작하는 장치)기는 흔히 바탄기, 밧탄기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원음을 충실히 따라서 배튼기라고 한다.
→족답(직)기558)足踏機는 인력을 이용한 직기 중에서 가장 완비된 구조를 가졌으며, 개량직기 중에서 생산력이 가장 높고, 구조도 복잡하고 비교적 비싼 직기였다. 예를 들어, 개량직기의 일종인 삼각배튼기가 1916년 당시 1대당 7∼10원이었는데, 족답기는 22∼30원으로 3∼4배의 가격이었다. 경성직물동업조합(1913설립)에서는 조합경비로 족답기(40대)를 구입하고 월부반환방식으로 조합원에게 배포시켰으며, 족답기 사용에 대한 책자도 만들어 내기도 하여 족답기의 보급과 사용을 권장했다고 한다(권태억, 앞의 글, 177∼178쪽).
족답(직)기는 1802년 영국인 레이디크리프(Radecliffe)가 발명하였다. 족답기는 다리의 운동만으로 開口·緯入·緯打의 조작을 하기 때문에 종래의 배튼기보다 손조작을 개방하였다. 다리운동을 동력으로 바꿈에 따라 역직기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일본에서는 1869년경 神奈川의 中津川藤吉이 서구의 기술에 영향을 받지 않고 고안하여 제1회 內國勸業박람회에 출품하여 花紋賞을 받았다고 한다(角山幸洋, 위의 글, 284∼301쪽).
이태호가 만든 직기는 족답기로 추측된다(≪황성신문≫, 1900년 1월 15일).
→역직기(power loom)559)力織機는 영국인 카트라이트(Cartwright, 1743∼1823)가 발명하여, 1785년에 특허권을 얻었다. 최초의 역직기는 매우 유치하여 실용되지는 않았지만, 날실·씨실 정지장치, 바디운동기구, 북바꾸는 장치 등의 운동기구를 포함한 역직기가 완성되었다. 일본에서의 역직기 발명은 제1회 內國勸業박람회에 출품된 수차직기가 있다. 그러나 직기기구의 구조상 동력원으로서 수력에는 무리가 있어서 원활한 회전을 얻지 못하여 마감에 사용되는 천으로는 정밀하고 치밀할 수 없었다. 따라서 곧 쇠퇴하고 거의 생산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수입된 서구의 역직기는 발명에의 자극은 주었어도, 그것을 단지 모방하고 일본산으로 만든 역직기는 철강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종래의 직기를 부분적으로 개량하는 도움을 줄 뿐이었다. 직기의 구성재료를 목제·반목제(목철혼제)·철제라는 과정으로 전환됨에 철제역직기가 완성되면서 수출을 위한 넓은 폭의 천을 짜는 광폭직기로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철제 광폭직기는 1909년에 완성되었으며, 자동직기는 1926년에 완성되었다(角山幸洋, 위의 글, 284∼301쪽).
경성직뉴합명회사(1910)가 설립될 때까지는 역직기를 이용한 회사는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권태억, 위의 글, 163쪽).
의 과정을 거치면서 개량되었다.

따라서, 개량직기(배튼기·족답기·쟈카드기560)쟈카드기는 1800년에 프랑스인 쟈카드(Jacquard, 1752∼1834)에 의해서 발명된 무늬직(紋織)장치이다. 구조는 각종 모양에 따라 수십 개소에 작은 구멍을 뚫은 두꺼운 종이 수백 매를 짜맞춘 무늬종이(型紙 또는 紋紙)를 직기의 위에 걸고 기계의 작용으로 차례로 회전함과 동시에 여러 개의 침이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무늬종이의 구멍 있는 곳만을 관통한다. 기타의 침은 무늬종이에 막혀서 관통하지 못하고 통과된 실을 끌어올리는 무늬부분에 필요한 날실(經糸)이 열리게 된다. 자카드기가 도입되어 재래의 무늬직기보다 4배 정도 제직능률이 향상되었다고 한다(角山幸洋, 위의 글, 284∼301쪽).)를 가지고 10∼40명의 임금노동자를 고용하고 분업을 행하고 있었던 대한제국 말기의 직물업체는 공장제수공업 수준의 공장이었으며, 경영형태는 매뉴팩츄어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561)권태억, 앞의 글, 185∼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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