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Ⅲ. 근대 과학기술
  • 2. 근대 과학기술의 도입
  • 4) 근대 산업기술
  • (3) 대한제국시기 방직기술의 이식
  • 나. 근대식 방직기술의 습득

나. 근대식 방직기술의 습득

1895년 이후 대량으로 유입되는 일제 면제품562)일본의 방적업은 청일전쟁 이후 한국시장을 독점하였는데, 면사수출세 면제(1894)와 면화수입세 면제(1896) 등으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여, 1897년에는 일본 국내의 면사수출고가 수입고를 능가하게 되었고, 한국시장에서는 1895년 인천항 수입면사의 87%를 일본산 면사가 차지하였다(권태억, 위의 글, 159쪽).을 국내 생산품으로 대체하고 방직공업의 보급과 방직기술자의 양성을 목적으로, 安駉壽 등이 주동이 되어 반관반민회사(대한직조공장)를 설립하여 일본의 방직기술을 도입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리고, 安衡中·朴正銑은 동경공업학교에서 염직기술을 배운 후에 1900년에 귀국하였으며, 한성제직회사에서도 일본에서 기술을 배운 姜永祐가 모든 직조기술을 맡았다고 한다.563)권태억, 위의 글, 163쪽.

한편 尹致昊는 외국선교사와 함께 개성남감리교회를 건립하고 교회의 육영사업으로 韓英書院(1904)을 설립·개교하였다. 당시 한영서원은 학생들의 실습장으로 機業場을 두고 일본으로부터 9대의 역직기를 도입·설치하여 학생들을 훈련시켰다. 윤치호는 면직업에 깊은 관심을 갖고 나라가 근대화되려면 면방직업을 기계화시켜야 한다564)조기준, 앞의 책(1973a), 277쪽.고 했다. 따라서 당시의 근대식 방직기술은 주로 일본을 통해서 습득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일제는 공업전습소(1907)를 설립하여 개량직기를 사용하는 직조기술을 보급시켰다.

1911년부터 시작된 전국의 33개소 機業전습소에서는 三角배튼기 등의 개량수직기의 사용법을 가르쳤으며, 전습을 마친 생도들에게는 이러한 개량직기를 무료로 제공하거나 지방 비용으로 보급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삼각배튼기는 중앙시험소에서 고안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당시 한국에 수입되는 일본의 직물수입품 중 70% 정도가 坐金巾·시팅(sheeting)565)시팅(sheeting)은 거친포(粗布) 또는 폭이 넓은 廣木을 말한다. 직포업을 겸영하는 방적자본의 기계제 대공장에서 생산되었다. 일본은 섬세한 고급의 면제품은 영국제와 경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두터운 실로 짜서 조선의 토착면포와 성질이 유사한 하급의 시팅을 주로 조선시장에 수출하였다(이헌창,≪한국경제통사≫, 법문사, 1999, 230쪽).이었기 때문에 개량직기가 짤 수 있는 소폭면포가 큰 문제가 될 수는 없었다.566)권태억, 앞의 글, 171∼172쪽.

근대식 방직기술의 습득과 관련하여 우리의 주목을 끄는 자료는 1906년 이후 일본인과 조선인 방직공장에 근무하는 조선인 직공수를 나타내는<표 4>와<표 5>이다.567)<표 4>와<표 5>을 작성할 때 충남대 경제학과 허수열교수가 조사한 자료를 활용하였다.

방직공업 공장수 일본인 직공수 조선인 직공수
1906년 1 4 36
1907년 2 65 120
1908년 3 33 153
1909년 4 26 177
1910년 2 222 0
1911년 7 35 199
1912년 9 48 312
1913년 12 32 625
1914년 22 124 1150
1915년 27 115 1342

<표 4>1906년∼1915년 일본인 방직공업 공장수 및 종업원수 변화

전거:≪조선총독부(통감부)통계연보≫, 해당 연도.
* 1910년도의 직공수가 일본인만으로 나타난 것은 당시 조선인 직공을 일본인으로 잘못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방직공업 공장수 일본인 직공수 조선인 직공수
1907년 1 0 10
1908년 1 0 10
1910년 6 0 195
1911년 9 0 259
1912년 16 13 395
1913년 15 2 339
1914년 22 5 452
1915년 30 5 479

<표 5>1906∼1915 조선인 방직공업 공장수 및 종업원수 변화

전거:≪조선총독부(통감부)통계연보≫, 해당 연도.

<표 4>와<표 5>에서 나타나 있듯이, 1906년 이후 일본인과 조선인의 방직공장수가 1910년을 전후하여 급격히 상승하듯이, 이들 공장에 근무하는 조선인의 직공수도 공장수의 증가율과 같은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일본의 근대식 방직기술을 수용하여 공장을 운영하고 기계식 직기를 다루는 조선인 공장과 조선인 직공이 증가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들 조선인 공장을 설립·운영한 자본의 형성과정과 조선인 직공들의 직기에 대한 숙련과정은 알 수 없으나, 방직공장과 방직공의 수가 1906년부터 점차 증가되고 있었던 것은 확인되었다.

따라서 대한제국시기부터 한일합병 초기까지 주로 일본에서 수입된 근대식 방직기계는 대부분 수직기에 머문 배튼기와 족답기로서, 원동기를 사용한 역직기를 이용한 근대적 방직공장은 설립되기는 하였으나 성공적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1906년부터 1915년까지 조선인이 설립·운영했던 방직공장과 일본인 방직공장에서 근무했던 조선인 직공을 포함한 전체 조선인 방직공의 수는 점차 증가하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렇듯 근대 초기 방직기술이 수동식의 직기에 머물도록 발전하지 못했던 이유로는 첫째, 조선인 민족기업가가 근대식 공장을 지을 만한 자본과 기술면에서 기반을 갖추지 못하였고, 둘째, 대한제국 정부가 국영공업을 확대 건설할 만한 근대화 의식이 강렬하지 못하였으며, 셋째, 1905년 이후 일본은 한국의 근대적 공장건설을 방해하였기 때문으로 이해된다.568)조기준, 앞의 글(1965), 863∼8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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