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Ⅲ. 근대 과학기술
  • 2. 근대 과학기술의 도입
  • 4) 근대 산업기술
  • (4) 1905년 이후 정미기술의 이식
  • 가. 정미기술의 이식

가. 정미기술의 이식

개항 이후부터 조선에 거주하기 시작한 일본인 이주자들에 의한 이식공업화는 주로 수출될 미곡의 가공공업, 이주민들을 위한 식품가공업, 농기구제조의 소규모 철공업, 건설자재 생산을 위한 기와·벽돌공업 등에서 이루어졌다.570)오두환,<총론-논점과 전망>(≪공업화의 제유형≫Ⅱ-한국의 역사적 경험-, 경문사, 1996), 6∼7쪽. 이들 이식공업 중에서 정미업이 주목되는데, 1890년 이래 1908년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중요 도시에 건설된 일본자본에 의한 근대 공업분야 가운데 가장 많은 일본인 공장은 정미공장으로 25개였다.571)정미공장 이외의 공장으로서는 연와 및 석회공장(15개), 철공장(12개), 기타 공장(연초·식량·피혁 등 27개)이 있었다(조기준, 앞의 글, 1965, 859쪽의<일본인 공장표>를 재구성). 특히 1906년 이후 일본인들이 신설한 공장의 반수 이상이 정미업에 집중되었으며, 한일합병 당시에는 일본인이 조선내의 비교적 대규모 공업의 거의 전부를 장악하였다.572)朝鮮硏究會,≪實業之朝鮮≫(1911), 320쪽.
전우용,<개항기 한인자본가의 형성과 성격>(≪國史館論叢≫41, 國史編纂委員會, 1993), 8쪽 재인용.

조선내의 일본인 공장에 비하여 소규모의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원동력을 가진 한국인 공장들도 1911년 현재 다음<표 6>과 같은 수준에서 설립·운영되고 있었는데, 가장 많은 공장수를 가진 업종은 정미업이었다.

업 종 공장수 기 술 자 직 공 원 동 력
한국인 일본인 한국인 일본인 기관수 마 력
직물업 10 11 4 288 2 10
정미업 15 172 15 16
제지업 9 10 108 1 2 22
금은세공
제련업
2 3 7 151 3 2 7
제분업 3 4 23 8 2 26
양조업 2 4 1 16 1 6
합 계 41 28 16 758 12 24 87

<표 6>원동력을 가진 한국인 공장의 업종별 직공수(1911년말)

전거:山口豊正,≪朝鮮之硏究≫(1914), 416∼418쪽;조기준,<한국근대경제발달사>(≪한국문화사대계≫Ⅱ 정치·경제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65), 862쪽 재구성.

조선에 이주한 일본인의 정미업은 1889년에 설립된 인천정미소로부터 시작되었는데, 1892년에는 인천에서 미국인 타운젠트가 미국에서 엥겔식 정곡기를 도입하여 60마력의 증기기관을 설치하였으며, 이후 여러 개항장에 당시로서는 현대적인 정미소가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573)당시 인천정미소에는 원동기가 4마력의 蒸氣汽罐, 가공기가 수차용의 돌절구(石臼) 기계 20대 있었으며, 석유식 발동기로 운전되는 최초의 정미소는 목포의 井出정미소라고 한다(오두환, 앞의 글, 51쪽). 특히 청일전쟁(1894∼1895) 이후에는 다수의 搗精機가 개항장에 수입되었으며, 부산 등지에는 일본인 도정기 제조업자까지 출현하였으며, 러일전쟁 직전부터 한국신문에는 일본인이 제작한 도정기를 판매하는 광고가 등장했다고 한다.574)≪皇城新聞≫, 1903년 8월 26일, 9월 21일, 광고.
≪大韓每日申報≫, 1907년 11월 7일, 12월 12일, 광고.
그런데 러일전쟁 이후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함에 따라 경성의 일본인 거류민들이 급증하면서 일본상인들은 경성의 조선인 시장에도 주목하게 되어 일본인 미곡상인들이 경성에 대거 진출하게 된다.575)러일전쟁 직전까지도 일본인 미곡상인의 침투는 크게 진전되지 않아서 1904년 6월 말경 경성에 거주하는 일본인 994호 중에서 미곡상은 6호뿐이었다(≪通商彙纂≫70,<韓國事情>, 1904일 11월 6일, 6쪽).
이헌창,<개항기 한국인 搗精業에 관한 연구>(≪경제사학≫7, 1984), 165쪽 재인용.

한편 조선정부는 군량미를 도정하기 위하여 萬里倉製粉製米工場을 건립(1889)하였으나,576)1886년부터 건립계획을 추진하고 1887년 5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889년 말에 완공된 만리창제분제미공장에는 수차기계, 화륜기계(증기기관), 제분기 등이 있었다(이헌창, 위의 글(1984), 160∼161쪽). 오래지 않아 가동되지 않았고, 1899년에는 궁내부에 정미소를 설립하였다. 궁내부의 정미소는 만리창제분제미공장과 마찬가지로 군량미의 도정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조선정부의 자본과 일본인의 도정기술이 결합되어 설립·운영되었다.577)이헌창, 위의 글, 161쪽. 조선정부의 정미소 설립에 비하여 늦기는 하였으나, 조선민간인에 의한 정미공장은 다음의<표 7>에서 알 수 있듯이, 대부분 1907년 이후에 설립되어 1911년까지 존속하였음이 확인되는데, 당시의 정미공장은 京江상인의 활동 근거지인 東幕·麻浦·西江 玄石里 등에 위치하고 있었다.578)조선 후기부터 경강상인들은 한강수운과 경성의 대시장을 배경으로 대표적인 상업자본을 성장시켰고, 미곡유통업을 보조하기 위하여 도정업도 경영하고 있었다(이헌창, 위의 글, 169∼172쪽).

<표 7>의 자료를 통하여 1911년 현재 원동기의 출력이 확인된 조선인 정미공장은 14개였으며, 기술자가 공장당 평균 1명이었고, 조선인 직공은 공장당 평균 13.4명이었으며, 원동기는 주로 석유엔진으로 평균 12.7마력이었다. 그러므로 한일합병 당시에 이미 조선에는 소규모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근대식의 공장제 기계공업이 정미업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또한 원동기의 출력이 조사된 조선인 정미공장에는 조선인 기술자(1명)가 활동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원동기(증기기관·전동기·석유엔진)를 다루기 위한 기술자로 판단되는데, 당시 정미기술에 있어서는 일본인에 기술적 종속을 당할 필요 없이 기계식 도정업을 발흥시킬 수 있는 조건을 이미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579)1903년에는 박화진이라는 조선인이 정미기계를 발명했다는 기사가 등장했다. “中署承洞居 朴華鎭氏가 精米機械를 新發明하얏난 每日 春米가 50石 假量이라고 形式을 模畵하야 農商工部에 請願하고 專賣權을 特許하라 하얏다더라”(≪皇城新聞≫, 1903년 6월 17일;이헌창, 위의 글, 172쪽, 재인용). 정미업이 성립한 지 불과 수년 사이에 기술적 조건이 이렇게 신속하게 성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조선 후기의 도정기술이 내재적으로 축적되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580)이헌창, 위의 글, 177쪽.

정미소이름 기술자 직 공 작업기 원동기 마 력
한인 일인 한인 일인 정미기 현미기
順 昌 1 1 32 34 6 22 증기기관 25
昇 源 1 4 5 2 3 전동기 5
韓 興 6 6 2 4 전동기 5
倉 洞 1 20 21 3 19 석유엔진 45
大 昌 1 16 17 4 10 10
信 昌 2 6 8 4 10 증기기관 8
大 成 1 10 11 3 5 석유엔진 8
順 成 1 23 24 6 3 12
永 昌 1 6 7 2 5 6
漢 興 1 14 15 3 6 8
東 一 1 17 18 4 10 10
孫相五 1 9 10 2 4 6
順 興 1 19 20 4 7 10
東 昌 1 16 17 4 7 20
공장수 14개 14 1 198 213 49 114   178

<표 7>일제 초기(1911) 원동기와 마력수가 확인된 조선인 정미공장 현황

전거:이헌창,<개항기 한국인 搗精業에 관한 연구>(≪경제사학≫7, 1984), 169∼170쪽의<표-7>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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