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2. 해외민족운동
  • 5) 일본
  • (2) 1910년대 일본지역 민족해방운동
  • 나. 유학생 단체

나. 유학생 단체

 1911년 조선총독부의<교육령>에서는 전문교육의 시기상조를 거론했고 중등교육의 ‘최상’을 얘기했다. 이에 따라 전문학교가 설립된 것은 1916년으로 이 해에는 경성전수학교와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설립을 거론할 수 있다. 1917년 연희전문·세브란스의전이 사립으로 설립되었다. 따라서 1919년 시기 대학 교육을 받고자 하면 일본 유학을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537) 조선총독부 학무국,≪조선교육요람≫, 111∼118쪽.

연도 단 체 명
1896 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東京)
1906 재일본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東京)
재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東京)
1907 早稻田大學조선동창회(東京)
재일본동경대학유학생학회(東京)
1909 재일본대한장학회(東京)
1911 재일본조선유학생친목회(東京)
1912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東京)
1914 재판조선인친목회(大阪)
1915 조선여자친목회(東京)
반도웅변회(東京), 조선학회(東京)
京都조선유학생회(京都)
京都조선유학생친목회(京都)
1916 동맹합자회(大阪)
1917 東京노동동지회(東京)
호남친목회(東京)
1918 합동회재단(大阪)
1919 조선인兵庫간친회(兵庫)
조선인저금회(大阪)

<표>일본지역 조선인단체 결성 상황

(姜徹,≪在日朝鮮人史年表≫(雄山閣, 1983), 10 ∼38쪽;정혜경,≪일제하 재일조선인 민족운동의 연구-오사카지방을 중심으로-≫(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1999) 참조).

 대한제국 시기부터 조선인 유학생들은 단체를 조직해 조직활동을 전개했는데, 1905년 이후 주요한 단체를 들면, 在日本東京朝鮮基督敎靑年會·大韓興學會·在日本朝鮮留學生親睦會·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在阪朝鮮人親睦會·京都朝鮮留學生親睦會·東京女子親睦會·東亞同盟會·朝鮮學會·結盟兄弟會·東京勞動同志會·東洋靑年同志會 등538)<朝鮮人槪況>, 대정 5·7·9년(朴慶植 編,≪在日朝鮮人關係資料集成≫1, 三一書房, 1975).이 있었다.

 이들 재일유학생이 단체를 결성하고 기관지를 발행하기 시작한 것은 1895년 大朝鮮人日本留學生親睦會였다. 이후 재일유학생들의 단체는 새로운 내용을 가졌는데, 1910년대의 경우 그 내용이 반일로 귀결되어 갔다. 이 가운데 몇몇 주요 단체에 대해 살펴보자.

 경도조선유학생친목회는 1915년 1월 24일 김우영 주도로 20여 명의 유학생을 중심으로 창립되어 활동을 시작해 2개월에 한번씩 모임을 가졌다. 재판조선인친목회는 강만형·정태·부남희·신태균·나경석 등이 주도했는데, 노동자의 구조를 외형상의 목적으로 내걸며 반일의식을 고취했다.539)<朝鮮人槪況>, 대정 5년(朴慶植 編,≪在日朝鮮人關係資料集成≫1, 三一書房, 1975), 49쪽.

 동경여자친목회는 김필례·나혜석의 발기로 李光洙·전영택의 후원 아래 조직되어 재일여성계의 주도세력이 되었는데,540) 박정애,<1910∼1920년대 초반 여자일본유학생 연구>(숙대 석사논문, 1999), 27쪽. 김마리아·황애시덕 등이 2·8운동에 적극 관여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541) 長久保宏人,<二·八獨立宣言への道-1910年代後半の在日朝鮮人留學生運動->(≪福大史學≫), 26∼30쪽. 동아연맹회는 金明植·김도연·양원모·최팔용·전익지·홍진의 등이 활동했고, 이들은 전술한 재일단체를 지도하기도 했다.542)<朝鮮人槪況>, 대정 7년(朴慶植 編,≪在日朝鮮人關係資料集成≫1, 三一書房, 1975), 67쪽. 조선학회는 이광수·신익희·김양수·장덕수·최두선·서춘·나용균·현상윤·전영택·김도연·백남훈 등이 활동했는데, 외형상으로는 조선에 대한 일반학술의 연구를 내걸었고, 내용상으로는 반일의식 고취를 선도했던 일은 잘 알려져 있다. 조선학회의 경우 회원 2인 이상의 보증이 있어야 입회가 가능했고, 공식적으로는 사무실을 운영하지 않았다. 이 단체의 구성원은 2·8운동을 주도했으며, 3·1운동을 일으키는 데 유력한 세력이 되었다.

 그런가하면 재일유학생들은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의 회관을 널리 사용했다. 즉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를 비롯한 조직은 모임의 회장으로 이곳을 빈번히 사용했고, 따라서 이곳에 있던 재일본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이하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는 재일유학생운동의 메카와 같이 되었다.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는 1903년 창립된 皇城基督敎靑年會의 일본지역 조선인 조직으로 1906년 설립543) 와이.유.엔,<在日本東京朝鮮基督敎靑年會略史>(≪使命≫10, 1936), 93쪽.된 이후 반일투쟁의 구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2·8운동 이후는 거의 반년 이상을 옥중의 동지 구원에 전력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2·8운동과 3·1운동이 있던 1919년 시기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의 간부는 회장 피셔, 부회장 김준연, 간사 백남훈, 서기 장영규, 종교부장 임종순, 교육부장 김종필, 체육부장 원달호, 친접부장 박형병, 홍제부장 정래길 등이었다. 이러한 인적구성은 학우회의 주요 성원과 중복되기도 했다.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는 월례회를 계속했고, 1920년 10월에 가서는 55명의 신입회원을 맞이하면서 새롭게 조직을 정비할 수 있었다. 당시 청년회의 주요 사업은 기관지의 발행, 대중 강연의 개최, 조직의 정비, 회관 건립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는 2·8운동 주도세력의 구원활동을 담당했다. 2·8운동의 과정에서 주모자로 검거, 구속되어 형을 언도 받은 崔八鏞·徐椿·金度演·金喆壽·宋繼白·金尙德·白寬洙·崙昌錫·李琮根 등에 대해서는 구원활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2·8 관련자들이 검거되어 미결로 있는 동안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의 간사 白南薰은 침구와 사식을 옥에 들여 보냈고, 기금도 모집했다.

 이상과 같은 재일단체를 만들었던 유학생을 이광수는<東京雜信>에서 세가지로 분류했다. 첫째, 세계대세와 현대문명을 일부분은 이해하고 또 전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둘째 세계와 현대문명을 모르고 관리로 출세할 것만을 생각하는 사람, 셋째 남이 유학하니 나도 유학한다고 하는 사람이었다.

 1910년대 당시 재일유학생 내부에서는 국권회복을 부르짖으며 비분강개를 털어놓는 사람이 절대 다수는 아니었다. 이러한 사람이 본격적으로 늘어난 것은 1917년 후반부터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는데, 국제정세의 변화 가운데 러시아혁명의 성공, 그리고 일본 내 1918년 8월 쌀소동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재일유학생들은 본격적인 반일투쟁을 준비했다. 그 투쟁은 1919년 2월 8일 일어났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1919년 2·8운동을 내용적으로 주도한 세력은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이하 학우회)였다. 학우회는 대한흥학회의 후신으로, 1911년 조선유학생친목회가 결성되었고, 이것이 다음해 3월 해산당하자, 유학생들은 종래의 도별 유학생 구락부를 기초로 하여 1912년 10월 학우회 조직에 성공했던 것이다. 이 회는 재일유학생이 조직한 단체 중 세력이 가장 컸으며, 처음 유학간 학생들은 반드시 이 회에 가입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학우회 회원간에 교제를 하지 않는 자는 ‘일본의 개’로 취급받았다.544) 김인덕, 앞의 글.

 학우회는 임시총회 및 웅변회, 졸업생 축하회, 신도래학생환영회, 운동회 등을 통하여 배일사상을 고취했고, 아울러 기관지≪학지광≫을 발간하여 유학생 뿐만 아니라 국내 학생에게도 신사상과 반일사상을 고취했다.

 창립 이후 1919년 2·8시기까지 학우회의 정치적 성격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중심적으로 운영에 참가하였던 인물을 열거하면, 제1그룹은 안재홍·신익희·백남훈·정노식·장덕수·현상윤·송진우·김성수·주종건·최두선·신석우 등이었다. 제2그룹은 2·8선언의 서명자들인 최팔용·김도연·이광수·김철수·백관수·윤창석·이종근·송계백·최근우·김상덕·서춘 등이었다.

 특히 2·8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에는 더욱 운동단체로의 조직이 강화되고 활동에 있어서도 내용성을 채워갔다. 1918년 2월 10일 정기총회 당시 역원들은 회장에 이공영, 총무에 이춘숙, 편집부장에 최팔용, 서무부장에 김안식, 운동부장에 이종근, 문서부장에 이세화, 그리고 평의원에는 윤창만·노익근·최팔용·성원경·서춘·민병세·김도연·김철수·이종근·고지영 등을 임명했다. 이후 이들의 상당수가 2·8운동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학우회에 망라된 유학생들은 1918년 4월 3일 운동회에서 조선지도를 그려놓고 한글로 단군의 소유라 하고, 단군의 기상이란 가장행렬에서는 을지문덕·정몽주·이순신·논개 등을 등장시키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18년 10월 26일 학우회 주최의 신도래학생환영회에서 김준연·김철수·백남규 등은 한결같이 민족의식을 강조하는 연설을 했으며, 11월 10일 반도웅변회에서는 이춘균·민영길 등이, 16일의 조선학회 강연회에서는 노익근이 시종일관 독립의식을 고취했다. 또한 같은해 12월 22일 학우회 편집부 주최의 연합웅변회에서는 계인상·김한근·성세풍·이병화·김환·김상덕·서춘 등이 민족자결론을 피력했다. 물론 여기에는 조선의 자주독립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리고 11월 30일 각급 학교 연합웅변회에서도 김범수·이응수·최원순·안성호 등이 시사문제를 언급하고 자주독립을 위한 민족자결론을 피력했다.

 이렇게 학우회는 다양한 형태의 집회를 통해 조선독립을 대중적으로 선전하고 조직의 강화를 도모했으며, 조선독립을 갈망하는 대중적 열기를 응집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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