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Ⅲ. 3·1운동
  • 2. 3·1운동의 전개
  • 2) 3·1운동의 발발
  • (3) 국내의 만세시위운동
  • 나. 시위의 전국확산

나. 시위의 전국확산

 3월 1일 서울·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 4개 道 7개 도시에서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은 서북지방과 경기·충남지방을 시작으로 전국에 파급되어 갔다. 강원도에서는 3월 10일 철원에서 최초의 만세시위가 일어났으며, 전북에서는 3월 3일 전주·군산·이리에서<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4일 옥구에서 최초의 시위가 일어났다. 전남은 3월 3일 목포·광양·구례·순천·여수 등지에서<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10일 최초의 시위가 광주에서 학생들에 의해 일어났다. 경남은 3월 3일 부산과 마산에서<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11일 부산진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경북 대구에서는 3월 8일, 함북 성진에서는 3월 10일, 충북 괴산에서는 3월 19일 각각 최초의 시위가 일어나 도내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3월 중순경에 들어서서는 마치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 방방곡곡에서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집중적인 시위운동은 최소한 4월 말까지 두 달간 계속되었다. 3월 1일부터 4월 11일까지는 매일 10회 이상 시위가 일어났으며, 시위운동의 정점을 이룬 4월 1일은 하루 동안 67회의 시위가 일어났다. 3월 27일, 4월 2일·3일은 50회 이상 일어났으며, 적어도 30회 이상 일어난 날만 15일이었다.

 참여인원으로 보면, 수십만이 참여한 서울을 제외하고서도, 의주 3만 명, 강화읍 약 2만 명, 합천·삼가 1만 명, 선천 8,000명, 삭주군 대관 8,000명, 선천읍 6,000명, 순천읍 5,000명, 명천군 화대 5,000명 등 대규모의 시위도 많았다.

 시위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시가지 대로상의 만세시위, 시골 장터에서 행한 장터 만세시위, 야간 산상의 봉화시위, 한 장소에서의 1회성 만세시위, 같은 장소에서 몇 차례 거듭된 시위운동, 인근 지역을 찾아다니며 행한 만세꾼들의 시위운동, 지역과 지역이 태극기를 이어 받으며 행한 릴레이 시위운동, 일제의 총칼에 목숨을 잃은 사람의 시신을 떠메고 행한 상여시위, 상점 문을 걸어 잠근 상인들의 철시시위, 학생들의 동맹휴학시위, 노동자들의 파업, 광부들의 순사주재소 습격시위, 어린이 시위, 거지들의 시위, 기생들의 시위 등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전계층이 다양한 형태로 참여하였다. 이렇게 행한 총 시위 회수는 2,000회 이상, 연인원 200만 이상으로 추산되었다.

 대부분의 시위는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다. 맨손의 우리 민중들은 손에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고 장터와 읍내 또는 시가를 행진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서북지방과 경기도 남부 지역, 경남북 산간지역과 해변지역 일대는 지역의 종교조직 또는 향촌 공동체적 유대를 활용하여 조직적·적극적으로 일본 관공서를 몰아내고, 완전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독립전쟁과 같은 양상도 있었다. 3월 2일 황해도 수안의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한 450∼500명의 시위대는 수안 헌병분견소를 찾아가 “이제 조선은 독립이 되었으니 일인들은 떠나라”고 요구하였다. 평안남도 성천에서도 천도교인이 중심이 된 시위대 1,000여 명이 헌병분견소로 몰려가 식민지 통치를 규탄하였다. 4월 1일 경기도 안성군 원곡·양성면에서 순사주재소를 방화, 면사무소, 우편소와 일본인 상점들을 파괴한 시위, 화성군 우정면 장안면민들의 총기로 인명을 살상한 순사 처단 등은 대표적인 공세적 시위운동이었다. 이들 지역에서는 일본 군대가 진입할 때 맞서 싸울 준비로서 동리 산위에 돌무더기를 쌓고 항전 준비를 하기도 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의≪독립신문≫에서는 이 시기 시위대를 “독립군”이라 불렀다.

유형 전기 중기 후기 지역별
1 A A O 서울
2 A B A 황해·평북
3 A B B 평남
4 B A A 경기
5 B A B 경북·함남
6 B B A 충남
7 B B B 전북·전남
8 B O A 강원
9 O A A 경남
10 O B A 충북
11 O B B 함북

<표>지역별 시위전개의 양상

A:집중적 발발
B:산발적 발발
O:미약, 미발

 도별로 시위운동의 유형을 보면 그 유형이 다르다. 집중적으로 일어난 3월 초·중순, 3월 말 및 4월초의 3기로 나누어 A:집중적 발발, B:산발적 발발, O:미약·미발로 나누어 시위전개의 양상을 나타내보면<표>와 같다.

 대체로 시위운동은 서울·황해·평북·평남의 서북 축에서 3월 초순에 치열하게 일어났다. 이후 운동이 경기-충남-전남과 강원-함남의, 서남과 북동의 대각선 축과 경북으로 확산되었다. 각 지역도 전개양상은 달랐다. 서울에서는 초기의 열기가 중기까지 이어지다 후기에 들어서는 거의 시위운동이 끝났으며, 평남은 3월 초순에만 격렬한 시위운동이 전개되었고 중순 이후 산발적인 시위로, 황해도와 평안북도는 3월 초순의 격렬한 시위 후 중순에 들어 산발적으로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3월 말 4월초의 후기에 다시 격화되었다. 이 네 지역은 종교조직을 통해 미리부터 조직적으로 준비되어 있던 지역이었다. 경기도는 3월 초 산발적인 시위를 보이다가 3월 중순에서 4월초까지 집중적인 발발, 경북과 함남은 중기에 시위가 집중되다 후기에 들어 산발적 시위로, 충남은 중기까지 산발적 시위를 보이다가 후기에 들어 집중적 시위를, 전남과 전북은 전기간 동안 산발적인 시위를 보였다. 강원도는 초기에 산발적 시위를 전개하다 중기에 휴지기를 거쳐 후기에 집중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경남과 충북, 함북은 초기에 거의 움직임이 없다가 중기 이후에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경남은 중기에 들어서자 격렬한 시위운동이 시작되어 후기까지 이어졌으며, 충북은 중기에 산발적 시위운동이 시작되어 후기에 가서 격화되었다. 함북은 중기에 시작된 산발적 시위운동이 후기까지 같은 양태로 지속하였다. 이와 같이 지역에 따라 시위운동은 다양한 양태를 띠고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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