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Ⅲ. 3·1운동
  • 3. 3·1운동의 해외 확산
  • 1) 중국 만주
  • (2) 서간도의 시위운동
  • 자. 집안현

자. 집안현

 압록강 대안의 집안현은 우리 동포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3월 17일 유하현 삼원보의 기독교인 6명이 집안현 致和堡 砬石岔의 기독교인에게 유하현의 소식을 전하자 그곳 기독교인 60명이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민단지부 철폐를 결의하였다. 21일 楊子橋子에서 기독교인 170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벌였다. 같은 날 菲菜園子에서는 한인 100명이 모여 시위운동을 벌였다. 25일에는 치화보 大檜溝에서 천도교인 60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하였다. 31일 충화보 小陽岔 서변 하계의 천도교 교구장 金呂植 등은 교인 120명과 함께 大洋岔 보갑국 부근 외차구 시가로 행진하였다. 대평구 磊石岔에서는 기독교인과 천도교인 약 400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하였다. 이날 납석차 교회에서 기독교인 천도교인 등 약 600명이 집결한 가운데 독립선언식을 하고 시가행진을 하였다. 4월 이후 시위운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4월 3일 서취보의 기독교인 崔錫俊과 李尙根 등은 치하보 雙岔河의 田俊杰 등과 한족회를 조직하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8일 通溝의 천도교인 200명은 통구 조선인조합 지부를 습격할 계획으로 시위운동을 벌였으나 중국 관헌의 제지로 실행하지 못했는데 다음날도 조선인조합 총지부 철폐를 주장하며 시위운동을 벌였다.
12일 피조구에서 7구장 金洛九 주도로 한인 200명이 시위운동을 하였다.
17일 紅石磊子에서 한인 400명이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8일 祥和堡 한인 200명은 楸皮溝에 집결하여 압록강을 따라 만세시위를 하였다.
19일 남자구 6구장 金吉甫 주도로 한인 250명이 시위하였다.
古馬嶺 大陽岔에서 한인 300명이 시위하였다.
집안현 馬蹄溝 부근 한인 700명이 雲海川 대안에 집결하여 국내 진공을 시도하였다.
20일 外岔溝 하류 압록강 연안 나무 위에 무수히 많은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橫浮子溝에서 한인 700명이 시위하였다.
22일 老荒地 거주 한인 수 명이 독립단을 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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