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Ⅲ. 3·1운동
  • 3. 3·1운동의 해외 확산
  • 2) 러시아 연해주
  • (3) 전로국내조선인회의

(3) 전로국내조선인회의

 1918년 말부터 1919년 초까지 연해주 독립운동지도자들은 국내외 각지의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해 왔다. 서울의 이종호·김하석과는 이용의 대표파견과 관련하여 이흥삼을 파견하여 접촉하였고, 상해 신한청년단과는 여운형이 노령을 방문하여 노령 지역 지도자들과 많은 접촉을 가졌다. 일본지역 동경 유학생들과는 1918년 말 이래 연락이 오고가고 있었으며, 1919년 2월 초에는 동경유학생 대표가 노령에 와서 문창범과 만났다. 간도지역과는 지역적으로 가까와 긴밀하게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1919년 2월 25일 니콜리스크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를 중심으로 노령과 간도 및 국내 대표자들이 전로국내조선인회의를 개최하자 金躍淵·鄭載冕 등이 간도대표로, 文秉浩·尹東喆이 훈춘대표로 참석하였다. 서간도에서도 대표 3명을 파견하였다. 전로국내조선인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따른 새로운 국제정세에 대응하여 노령과 중국 한인들의 의사를 집약,<독립선언서>의 발표와 시위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 계획, 이를 추진할 대한국민의회의 조직 등을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국내와 만주·노령 한인의 대표기관으로서 대한국민의회가 설립되고, 대표에 文昌範, 부의장 金哲勳, 서기 吳昌煥을 선출하였으며, 1919년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 명의의<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상설의원 30명과 통상의원 40∼50명으로 구성하여 민족적 대표성을 강화하였으며, 집행부로서 선전부(후에 군무부로 개칭)·재무부·외교부의 3개 부서를 두었다. 지방조직으로 전로한족중앙총회의 지방조직과 훈춘지부·간도지부 및 국내의 경성국민의회도 조직되었다.

 전로국내조선인회의에서 3단계 독립운동방안이 강구되었다. 제1운동은<독립선언서>발표, 태극기 게양, 가두시위운동, 제2운동은 국내외 무장세력에 의한 국내진입 무력시위운동, 제3운동은 무력시위운동과 동시에 미국으로 하여금 일본에 간섭케 하고 파리평화회의에 한국 독립문제를 상정하는 것으로 정했다. 강화회의에 의제로 상정한다는 것은 국내를 ‘兵亂地’로 만들어 연합국으로 하여금 교전단체로 승인하게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1만 명의 결사대를 조직 국내진입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