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3월 26일에는 블라디보스톡에서 老人同盟團의 발단식이 있었다. 金致寶의 집에서 조직된 이 노인동맹단은 한국독립을 목적으로 재외한인 65세 이상의 노인을 모두 결속하려는 데 있었다.679) 위와 같음. 이들은 이날 밤 김치보 집에서 창단식을 갖고 다음과 같이 역원을 선출하였다.680) 在浦潮斯德總領事 菊池義郞,<鮮人의 行動에 關한 件, 1919년 4월 1일>(≪東西比利亞≫7), 59∼60쪽.
단장 金致寶, 총무 金舜若, 의장 李逸, 의원 李崙·朴凞平·韓承羽·李得萬·尹余玉·周干漸·姜錫基·徐相矩·鄭致允·李逸·朴大同(11명), 서기 徐相矩.
이 당시 약 320여 명을 단원으로 모집하였는데, 계속해서 왕성하게 단원을 모집 중이며, 남자보다도 오히려 여자들이 더 열심이어서 지방으로까지 다니며 단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노인동맹단은 대표자 6명을 조선총독부에 파견할 것과 결사대를 모집하여 국내로 들여보낼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으며, 이 밖에 단원 150명을 국내로 파견하여 3·1운동을 확산할 계획도 하였다.681) 在浦潮斯德總領事 菊池義郞,<鮮人의 行動에 關한 件, 1919년 4월 1일>(≪東西比利亞≫7), 59∼62쪽. 이 노인동맹단은 점차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노인동맹단은 傳團委員을 두어 이들을 각 지방에 파견하여 단원모집에 힘썼다. 전단위원들은 발기인을 7인으로 하고, 입회금도 7루불씩 하였으며, 연령도 46세 이상 70세까지로 하여 총 7,000명의 회원을 모집하려 하였다.682)<獨立運動에 關한 件>, 騷密 제209호(1919년 4월 17일)(國會圖書館,≪韓國民族運動史料≫3·1운동편 其3, 1979), 280쪽.
5월 5일 노인동맹단은 李承喬 등 대표 7명을 선정하여 국내로 파견하였다.683) 姜德相,≪現代史資料≫26, 121∼122쪽. 이들 대표들은 일본에 보내는 문서 2통과 취지서 수백 매, 여비 1만 루불을 지참하고 출발, 5월 31일 서울에 도착하여68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9, 348쪽. 그날 오전 11시 경 종로 보신각 앞에서 민중들에게 연설을 한 후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었다. 이때 李發은 “義로써 치욕을 당하지 않겠다”며 칼로 스스로 목을 찔렀으나 일경이 그를 대한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이승교와 정치윤은 너무 노쇠하여 露領으로 추방당하였으며,685) 朴殷植,≪韓國獨立運動之血史≫하, 53쪽.
金正明,≪朝鮮獨立運動≫제1권 分冊(原書房, 1967), 116∼117쪽. 안태순은 징역 1년, 윤여옥은 징역 10월, 차대유는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68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5, 252∼253쪽.
6월 25일 노인동맹단은 姜文伯·延秉佑를 대표로 블라디보스톡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 보내<在露領大韓國民老人同盟團謹瀝血禱衷干>이라는 독립요구서를 제출하였다.687) 姜德相,≪現代史資料≫ 26, 222쪽. 1918년 8월 노인동맹단은 다시 강우규를 서울로 파견하였다. 강우규는 7월 8일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원산에서 약 1개월 체류하다가 8월 8∼9일 경 서울로 들어와 9월 2일 서울역 앞에서 신임총독 사이토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688) 金正明, 앞의 책, 115쪽.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