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2. 수탈체제의 강화
  • 4) 재정·금융
  • (2) 금융
  • 가. 식산은행

가. 식산은행

 1910년대 후반의 호황으로 산업의 규모가 확대되고 자금 수요가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산업자금을 공급하는 ‘동척-농공은행-금융조합’의 계통적 기구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자 조선총독부는 1918년 6월 農工銀行을 합병, 해산하고 산업금융을 전담하는 특수은행인 殖産銀行171)이하 식산은행에 대한 서술은 다음의 글 참조.
배영목,<조선식산은행과 농업>(≪국사관논총≫79, 1992).
정병욱,≪일제하 조선식산은행의 산업금융에 관한 연구≫(고려대 박사학위논문, 1998).
을 설립하였다. 식산은행은 자본금을 농공은행의 4배인 1,000만원으로 늘리고 채권의 발행한도를 납입자본금의 10배로 확장하는 한편 ‘일본신민’이면 누구나 주주가 될 수 있게 함으로써 자금동원력을 크게 강화하였다. 또한 부동산 담보 대부와 유가증권 대부의 제한을 철폐하고 신탁업무와 저축업무를 추가하여 업무영역을 대폭 확장하였다.

 1920년에서 1930년까지 10년간 식산은행은 납입자본금이 4배, 예금이 4배, 대출이 10배 증가하는 등 예기치 못한 확장을 이룩하였으며, 이에 따라 창립시 전 금융기관의 20% 정도이던 대출이 1931년에는 44%로 크게 증가하여 산업자금을 공급하는 중추적인 금융기관으로 자리잡았다. 1920년대 식산은행의 급속한 확장을 뒷받침한 것은 자금동원력의 강화였다. 창립시 2,000만원 정도이던 자금조달액이 1930년에 3억 원을 넘어서게 되는데, 그 중 채권발행이 50∼60% 정도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고 그 다음으로 예금이 25∼30%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였다. 자금조달에서 채권발행의 비중이 크고 채권의 대부분이 일본에서 소화되었기 때문에 식산은행의 자금조달은 일본 금융시장의 상황에 크게 좌우되었다. 또한 일본 대장성 예금부가 정책자금을 지원하기 위하여 저리로 사채의 일부를 인수하였다. 1920년대 전반까지 채권발행액의 10∼20% 정도를 대장성 예금부가 인수하였으나, 산미증식갱신계획이 실시되는 1926년부터 인수액이 20∼30%로 증가하였다.

  납입자본 적립금 채권발행 정부대하 차용금 예금고 저축계정
1919 8,059 625 17,500(24%) 1,459 11,927 32,916 355 72,841
1921 15,000 1,108 49,500(38%) 1,459 27,043 37,067 178 131,355
1923 15,000 2,003 100,250(56%) 1,459 14,040 40,350 4,920 178,022
1925 15,000 3,153 135,976(64%) 1,459 1,200 47,416 6,776 210,980
1927 15,000 5,503 173,445(66%) 1,459 1,205 52,482 13,518 262,612
1929 20,000 7,043 199,685(65%) 1,459 4 58,327 19,485 306,003

<표 9>식산은행의 자금조달 추이 (단위:천원)

배영목,<조선식산은행과 농업>(≪국사관논총≫79, 1992), 179쪽.

 이렇게 채권발행을 통해 조달한 자금은 농업부문에 공급되었고, 예금을 통해 조성한 자금은 상업부문에 공급되었다. 식산은행의 산업별 대출추이를 보면 창립 초기에는 절반 이상이 상업대출이었지만 1923년부터 농업대출이 상업대출을 앞질렀다. 특히 산미증식갱신계획이 시작되는 1926년부터 농업대출은 급격히 증가하여 전체 대출의 50∼60% 정도를 차지하였다. 식산은행의 대출은 용도별로 산업·공공대부,172)산업·공공대부는 산업대부와 공공대부로 구성된다. 산업대부는 부동산·어업권·재단을 담보로 하는 50년 이내 연부상환 및 5년 이내의 정기상환 대부인데, 장기자금을 필요로 하는 개인이나 회사에게 확실한 담보를 전제로 제공되었다. 공공대부는 농공업자 10인 이상의 연대보증에 의한 무담보 정기상환 대부, 공공단체 및 금융조합 같은 비영리법인에 대한 무담보 연부상환 및 정기상환 대부, 다른 은행이나 회사의 업무대리에 의한 대부인데, 공공기관이나 산업단체에 제공되는 정책금융의 일종이었다. 일반대부, 저축대부로 구성되는데, 이 중 장기대부인 산업·공공대부의 비중이 2/3 이상을 차지하였다. 산업·공공대부는 산업 각 부문에 제공되는 장기 저리의 정책금융으로, 행정·위생·교육·토목·한해구제 등 각종 공공사업에 소요되는 자금, 농사개량·토지개량·수리조합 등 농업관련 사업에 소요되는 자금, 금융조합의 활동에 소요되는 자금, 상업·교통·운수사업에 소요되는 자금, 토지·건물 등의 구입이나 지주의 고리채 정리에 소요되는 자금, 광공업·전기가스업에 소요되는 자금 등을 공급하였다.

연도 산업·
공공대부
비중 산업대부 공공대부
소계 농업자 공업자 상업자 소계 수리
조합
금융
조합
1921  77,936 60% 42,829 82% 6% 16% 30,882 28% 47%
1923 119,509 70%  66,936 63% 6% 24% 47,809 45% 37%
1925 138,796 70%  81,101 58% 6% 27% 57,302 53% 28%
1927 174,912 73% 101,093 64% 5% 25% 73,476 60% 26%
1929 207,355 77% 124,179 70% 4% 18% 83,174 66% 23%

<표 10>식산은행 산업·공공대부의 구성

배영목,<조선식산은행과 농업>(≪국사관논총≫79, 1992), 193쪽.

 이 중 ‘농업’(경지구입·종묘·비료·농기구 등), ‘수리사업’, ‘토지개량’, ‘금융조합연합회’ 등 농업관련 항목이 1920년대 전반에는 전체 대부액의 60∼65%, 1920년대 후반에는 70%를 상회하였다. 그리고 산업대부 중 2/3 가량이 농업자에게 제공되었고 공공대부의 대부분은 수리조합과 금융조합연합회에 제공되었다.

 식산은행은 공공단체나 수리조합·금융조합 같은 비영리법인에 대해서는 담보 없이 대출하였으나 개인이나 회사에 대해서는 부동산, 특히 전답과 같은 농경지를 담보로 대출하였다. 이처럼 농경지를 담보로 한 대출이 담보대출의 대부분을 점하였고 건당 대출액이 5,000원 이상으로 500원 가량이던 금융조합 건당 대출액의 10배가 넘는 고액이었다는 점에서 식산은행은 주로 지주층에게 농사자금을 공급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173)1925년과 1929년의 경우 용도별 장기대부의 1구당 금액은 토지개량이 5,394원과 10,960원, 농업이 3,176원과 3,598원, 부채정리가 11,430원과 13,700원이었다. 이를 당시 평균 지가에 따라 경지면적으로 환산하면 토지개량은 4.8정보, 농업은 2.8정보, 부채정리는 10.1정보이며, 대부액을 시가의 1/2로 규정하면 대부자는 5.6정보에서 25.6정보 사이의 토지를 가진 계층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인 대출의 비중이 전체 대출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며, 도시 지점에서는 일본인 대출이 압도적이지만 농촌 지점에서는 조선인 대출이 일본인 대출을 능가하였다. 1920년대 조선은행의 조선인 대출이 10% 내외였던 것에 비하면 식산은행의 정책자금은 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인에게, 특히 조선인 지주에게 집중적으로 공급되었다.

 식산은행은 정책금융기관으로서 총독부가 추진한 산미증식계획의 자금 공급을 담당하였다. 식산은행은 창립 직후부터 대장성 예금부가 공급한 자금과 당행이 조달한 보통자금으로 수리사업 및 토지개량사업에 자금을 공급해 왔으며, 1926년 산미증식갱신계획이 실시되면서 본격적으로 정책자금의 공급을 담당하였다. 1926년부터 예금부 저리자금과 보통자금을 각각 1/2씩 조달하여 매년 산미증식갱신계획에 의한 토지개량사업 및 농사개량사업 자금을 공급하였는데, 1929년의 경우 토지개량사업 대출이 식산은행 전체 토지개량사업 대출잔액의 25%를 차지하였으며, 농사개량사업 대출이 전체 토지개량사업 대출잔액의 6% 정도를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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