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2. 봉오동승첩과 청산리대첩
  • 2) 청산리대첩
  • (4) 청산리대첩
  • 라. 어랑촌전투

라. 어랑촌전투

 청산리대첩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전투는 이도구 어랑촌 일대에서 벌어진 격전이었다. 어랑촌은 국치 전후 함북 鏡城郡 漁郞社의 주민 10여 호가 이도구에서 서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골짜기 안에 이주하여 개척한 한인 마을이다.

 전투는 어랑촌 마을 일대에서 10월 22일 하루 종일 벌어졌다. 당일 새벽 천수평에서 살아남은 네 명의 일본군이 어랑촌 앞 二道河 부근에 주둔해 있던 아즈마지대 본대에 참패 사실을 알려왔다. 이에 본대에서는 가노우(加納) 기병연대를 필두로 한 대부대를 천수평으로 급파시켰다. 한편 천수평전투 직후 대한군정서군은 어랑촌 방향의 鷄南 부근 ‘野鷄골’로 내려와 그곳의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뒤 출동한 일본군 대부대와 전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어랑촌전투에는 독립군과 일본군 양쪽 모두 全力이 투입되었다. 독립군측에서는 백운평과 천수평에서 연승을 거둔 대한군정서 600명과, 완루구에서 완승한 뒤 이곳으로 이동해 온 홍범도 휘하의 연합부대 1,500명이 총동원되었다. 반면 이 전투에 참여한 일본군 병력규모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어랑촌 부근에 임시 본대를 둔 아즈마지대 소속의 보병·기병·포병 등 주력 5천여 명이 이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던 사실은 확인된다. 이렇게 볼 때 일본군은 독립군에 비해 병력과 화력 양면에서 월등히 우세한 입장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후 승리는 독립군측에 귀착되었다. 투철한 항일의지로 무장한 독립군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뛰어난 전술을 구사해 일본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가하며 대규모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어랑촌전투에서 독립군측은 먼저 대한군정서군이 어랑촌 후방의 고지를 장악하여 일본군의 진출로를 차단하고, 이어 홍범도 휘하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같은 고지 최고봉에 포진하여 대한군정서군을 지원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일본군은 우세한 전력만을 믿고 희생을 무릅쓴 공격을 감행해 왔다. 독립군은 지형상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가오는 일본군을 향해 조준사격을 가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단시간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자 공세를 멈추고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그러나 공격을 단념하지는 않았다. 일본군 기병대는 천수평의 서방 고지를 따라 독립군의 측면공격을 시도하였으며, 포병과 보병은 독립군 진영의 정면에서 격렬한 공격을 재개하였다. 오전 9시부터 재개된 일본군의 공세는 해질 무렵까지 반복되었다. 그러나 지형상 우세를 점한 독립군은 일본군의 파상공세를 적절히 차단하면서 효과적인 반격을 가하며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군의 피해는 늘어만 갈 뿐이었다.

 상해 임시정부는 이러한 어랑촌전투에서 독립군이 승리를 거두어 일본군 300명을 사살한 것으로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측은 참패 사실을 숨기고 단지 전사자 3명, 부상자 11명이라는 허위기록을 남겼다.482)姜德相 編,≪現代史資料≫28, 223∼224쪽. 한편 이 전투에 참전하였던 이범석은 가노우 연대장을 비롯해 일본군 1천여 명을 살상한 것으로 추산하였고, 독립군도 1백여 명이 사상한 것으로 회상하였다.483)李範奭, 앞의 책, 52쪽.

 어랑촌전투 후 대한군정서 독립군은 안도현의 黃口嶺을 향해 소부대로 나뉘어 행군하였다. 또한 행군과정에서도 일본군과 도처에서 산발적인 혈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완루구 산림 속에서 하룻밤을 지낸 대한군정서군은 23일 낮 맹개골 삼림 속에서 일본군 30여 명을 발견하고 이들을 기습함으로써 기병 1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맹개골로부터 20여 리 떨어진 萬麒溝에서도 50여 명의 일본군과 조우전을 벌여 30여 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와 같은 맹개골전투와 만기구전투도 청산리대첩의 여러 전투 가운데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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