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1. 1920년대 국내 민족주의 세력의 동향
  • 1) 1920년대 전반의 ‘문화운동’
  • (3) 학교설립운동
  • 다. 야학과 강습소의 개설

다. 야학과 강습소의 개설

 1920년대 초반 교육진흥운동은 한편으로는 학교설립운동으로 진행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서당개량운동, 야학과 강습소의 개설운동이 전개되었다.

 서당의 개량이란 구래의 서당에서 한문만이 아니라 일본어·조선어·산술·지리·역사 등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하였다. 개량서당은 이미 1910년대 사립학교가 탄압을 받으면서 등장한 것이었는데, 1920년대 초 문화운동론자들은 교육열의 고조와 그에 따른 입학난과 관련하여 서당개량론을 활발히 개진하였다. 당시 서당의 실정을 보면, 1911년 16,540개에서 1915년 2만 3,441개, 1920년 2만 5,492개로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서당에 수용되는 학생수도 1920년에는 29만 2,625명으로 각종 초등학교 학생 총수 15만 7,851명의 2배 가까운 수를 기록하고 있었다.032) 노영택,≪일제하 민중교육운동사≫(탐구당, 1979), 98∼101쪽. 이를 볼 때 당시 서당이 초등 수준의 교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서당교육은 1918년에 만들어진<서당규칙>에 의해 교과내용과 교과서 등에서 관의 감독을 받게 되어 있었고,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자는 교사의 자격이 없었다. 도 장관은 유해하다고 판단될 때에는 서당을 폐쇄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개량서당의 교육 내용도 부분적으로는 자율적이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일제의 식민지 교육방침의 통제하에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주야학강습소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입학난 혹은 가정형편 등으로 인해 학교교육을 받기 어렵게 된 아동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농민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주야학강습소는 주간의 경우에는 ‘강습소’(혹은 강습회)라 불렸고, 야간의 경우에는 야학이라 불렸다. 1920년대 초의 강습소는 대체로 각 지방의 유지·청년회·개량적 노동운동단체·종교단체에 의해 설치되었으며, 특히 각 지방청년회는 대부분 강습소 설치를 주요 사업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이들 강습소의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22년 5월 현재 경남지방에서만 223개소의 강습소가 14,155명의 학생을 수용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경남의 각종 초중등학교 재학생 3만 1,990명과 1,567개 서당의 학생 1만 9,274명의 수와 비교할 때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033)<조선문화의 기본조사>(≪개벽≫34, 1923. 4), 5∼10쪽. 그런데 이들 사설 강습소는 1913년의<사설학술강습회에 관한 건>에 의해 설치 자체가 허가제(도지사의 인가제)로 되어 있었고, 강습 기간도 1년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강습소의 학기는 1년의 단기로 될 수밖에 없었으며, 교사도 초등학교 졸업자가 다수여서 교육의 질은 높아질래야 높아질 수 없었다.034) 노영택, 앞의 책, 156∼157쪽. 물론 교과목은 보통학교의 그것과 별다름 없이 조선어·일본어·한문·산술 등으로 되어 있었으나, 이 강습회가 흔히 ‘통속교육’이라 불렸던 데에서 드러나듯이 그 수준은 낮은 것이었다. 하지만 주야학강습소는 당시 학교가 부족한 상황에서 주로 노동자·농민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최소한의 신교육을 보급하는 구실을 한 것은 틀림없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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