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공산대학출신이며 과거 화요파 출신인 김단야·김정하·권오직 등은 귀국하여 1929년 11월 6일 서울에서 채규항·박민영 등과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를 결성한다. 이들은 조직부-김단야, 조사부-채규항, 선전부-권오직·김정하, 연락부-박민영 등으로 하는 조직체계를 갖추고 경성·원산·부산·평양·목포·함흥·마산·청진·웅기·신의주 등지에 기본당원을 배치하고 새로 입국할 공산대학 졸업생을 파견하여 지방 당기관을 설치하기로 했다.217) 堀內稔,<조선공산당재건운동>(並木眞人 외≪1930년대 민족해방운동≫, 거름, 1984), 302쪽.
1930년 1월 권오직·채규항·박민 등은 부산방적회사 동맹파업을 선동하고 인천 加藤정미소의 파업투쟁을 적극 원조할 것을 협의하여 조직원을 현장에 보내고 전국 노동단체에 격문을 보내어 파업기금을 모으는 등 활동을 했다. 그러나 1930년 3·1운동 11주년 기념 격문이 단서가 되어 이들은 대부분 체포되어 활동이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블라디보스톡 등지에서 활동하던 김단야 등은 1931년 3월 박헌영과 ≪콤뮤니스트≫창간호를 발간하여 ‘코민테른을 지지하고 분파주의에 맞서는 무기’로서의 역할과 ‘부분적 요구를 전체 요구에 종속시키며 다수의 투쟁을 상호연결시켜 공동투쟁으로 전개하고 국내운동을 국제적 투쟁과 연결시킬 볼세비키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1931년 3월부터 1932년 7월 무렵까지 ≪콤뮤니스트≫7호를 발간한 ‘콤뮤니스트그룹’은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 시기의 당재건 노선인 공장세포(공산주의자 소그룹·독서회) → 시위원회 → 지역위원회(지역당조직, 지역별 공산주의자단위) → 전국협의회 → 조선공산당재건 이라는 방침을 그대로 고수하였다.218) 최규진, 앞의 책, 211쪽.
이와 같이 1925년 4월 창건되어 1928년 12월 해체된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위한 각 분파들의 당재건운동은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를 거듭했지만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말에 이르는 당재건 운동의 결과는 1945년 8월 해방 직후 박헌영 등 과거 화요파가 중심이 된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통한 조선공산당의 재건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全明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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