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1. 농민운동
  • 4) 농민운동의 전개
  • (1) 1920년대 전반기
  • 가. 암태도 소작쟁의

가. 암태도 소작쟁의

 岩泰島 소작쟁의는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도의 소작농민들이 지주 文在喆과 그를 비호하는 일제에 대항하여 1923년 8월부터 1924년 8월까지 벌인 농민항쟁을 말한다.378) 趙東杰,≪日帝下 韓國農民運動史≫(한길사, 1979).
박천우,<韓末·日帝下의 地主制 硏究-岩泰島 文氏家의 地主로의 성장과 그 변동->(연세대 석사학위논문, 1983).
문재철은 암태도 수곡리 출신으로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에 편승하여 토지소유를 확대한 전형적인 식민성 지주였다. 그리하여 1920년대에는 암태도·慈恩島 등의 도서지역을 비롯한 전라남도 일대와 전라북도 고창 등지에 755정보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로 성장하였다. 그 가운데 암태도에는 1923년 쟁의 발발 당시 약 140정보(논 98정보, 밭 42정보)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문재철은 이들 소유지를 마름의 감독 아래 경영하였는데, 1910년대에는 지세 및 영농 제경비를 공동부담으로 하는 半分打租制로 소작료를 징수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일제의 저미가 정책으로 말미암아 수익이 감소함에 따라 그는 소작료 증수로써 손실분을 보충하려 하였다. 그 중에서도 암태도의 경우가 유난히 심하여 執租制의 방식으로 7할 내지 8할의 소작료를 징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암태도 소작농민들은 1923년 8월 추수기를 앞두고, 徐邰晳의 주도로 소작인들의 권익단체로 암태소작회를 만들어 소작료를 4할로 인하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요구가 묵살되자 소작회측은 1차적으로 추수거부를 지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협을 시도하여 갔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지주측의 타협 거부로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못하자 소작회측은 소작료 불납동맹을 체결하여 본격적인 쟁의에 돌입한 것이다.

 우선 소작회측은 소작인들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행동통일을 이루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소작인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12월 열린 소작인대회에서 암태소작회는 ① 금년 소작료는 논 4할·밭 3할로 할 것, ② 이러한 소작료에 응하지 않는 지주가 있을 경우에는 본회원은 모두 그 지주가 깨달을 때까지 소작료를 납부하지 말 것, ③ 지주와 분규가 발생하여 다음해 2월 15일까지 해결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 지주에 관계된 회원 일동은 罷作을 단행할 것, ④ 10리 이상의 소작료 운반에 드는 운임은 지주가 부담할 것, ⑤ 마름을 인정하지 말 것 등을 결의하고, 이를 1924년 1월 지주에게 통고하여 승인하도록 요구하였다.

 문재철 지주측은 이같은 암태소작회의 요구조건을 전면 거부하고 개별적으로 소작료 강제징수에 나섰다. 이때 목포경찰서는 경찰대를 출동시켜 무력시위를 벌이며 소작인들을 위협하였고, 이와 같은 강권을 배경으로 지주측은 소작료를 강제로 징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소작농민들의 집단적인 항거로 인하여 소작료를 징수할 수 없게 되자, 지주측에서는 소작인들을 개별적으로 회유 또는 협박하며 소작료를 거두어 갔다. 이에 대하여 소작인회에서는 자체로 순찰대를 조직하여 지주측의 강압에 무력으로 대항하면서, 1924년 봄까지 소작료 납부 거부항쟁을 계속하였다.

 나아가 1924년 3월 27일에는 와촌리에서 面民대회를 열어 소작인간의 단합을 공고히 하는 한편, 5월 15일까지 요구에 불응할 때에는 암태도에 있는 문재철 부친의 頌德碑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런데 이때 지주측은 면민대회를 마치고 귀가하는 소작인들을 습격하여 상해를 입히고, 면민대회의 결의를 묵살하였던 것이다.

 암태소작회 지도부는 이같은 상황에서는 지주를 상대로 소작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고, 그에 따라 신문이나 노동단체 등 언론·사회단체에 지원을 호소하였다. 그 결과 각 신문에서는 연일 암태도 소작쟁의를 보도하면서 여론을 일으켜 갔다. 또한 소작회에서는 1924년 4월 15일에 열리는 전조선노농대회에 대표를 파견하여 소작문제를 호소하기로 하였는데,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분개한 소작인들은 그해 4월 22일 문재철 아버지의 송덕비를 파괴하는 한편, 이를 저지하기 위해 지주측에서 동원한 청년들과 대규모의 난투극을 벌였다.

 목포경찰서에서는 이를 빌미로 소작회 간부 및 50여 명의 소작인들을 체포한 뒤, 그 가운데 주도인물 13명을 구속하면서 쟁의를 탄압하여 갔다. 이렇듯 사태가 악화됨에 따라 그 동안 뒤에서 쟁의를 이끌던 암태청년회 회장 朴福永이 전면에 나서 쟁의를 지도하였다. 아울러 암태부인회도 쟁의에 참여함으로써, 이제 암태도 소작쟁의는 소작인만의 일로 국한되지 않고 암태도 전 주민의 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6월 2일 암태소작회·암태청년회·암태부녀회는 재차 면민대회를 개최하여 일제 경찰의 편파적 처사와 지주의 부당성을 규탄하면서 소작회 간부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또한 목포로 진출하여 항쟁할 것을 결의한 뒤, 400여 명의 시위인원을 선발하여 다음과 같은 지시사항을 시달하였다. ① 목포에서는 소작회 간부 金龍學의 지시에 따른다. ② 목포에서는 허가 없이 자기 자리를 이탈해서는 안되고, 비바람을 무릅쓰고 목적 달성에 협력한다. ③ 5일분의 양식과 소금을 휴대하고 10명씩 1조가 되어 솥을 가지고 간다. ④ 6월 4일 신강리 나루터에서 떠난다. 이에 따라 암태도 소작농민들은 6월 4일부터 8일까지 목포경찰서·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앞에서 철야로 시위농성을 벌였지만, 일제 경찰의 강경한 탄압과 식량 부족으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철수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월 8일부터 600여 명의 소작농민들은 암태소작회의 지휘 아래 다시 목포로 진출하여 餓死同盟을 맺고 법원 마당에서 단식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7월 11일에는 문재철의 집으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이때 목포경찰서에서는 일방적으로 문재철 지주측을 비호하여 해산명령을 내리고 불응하는 소작인 26명을 체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투쟁을 계속하여 갔던 것이다.

 결국 목포 사회단체의 지원과 쟁의의 전국적인 파급효과를 우려한 일제 경찰은 소작인들의 요구조건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7월 14일 암태소작회측은 목포경찰서장으로부터 구속·수감되어 있던 26명의 소작인들의 석방을 약속 받았고, 목포지청 수석판사로부터는 1주일 이내 사건 해결과 병자 보석이라는 성과를 얻어냈다.

 하지만 초기 투쟁단계에서 붙잡힌 소작회 간부 13명의 석방은 이루어지지 못했음은 물론 이들이 광주형무소로 이송되어 감에 따라 암태소작회는 그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리하여 암태소작회는 7월 27일 재차 소작인총회를 개최하여, “광주에 가서 옥고를 치르고 있는 13인과 죽음을 같이 하겠다”고 결의하면서 투쟁방략을 세워나갔다.

 이러한 암태도 소작쟁의에 대해 목포 사회단체는 물론 전국 각지 사회단체의 측면지원이 이어졌다. 그같은 여론을 일으킨 데는 언론의 역할이 컸다. 특히≪동아일보≫는 암태도 소작쟁의를 생생하게 보도하여 전국적으로 관심을 집중시켰던 것이다. 예컨대≪동아일보≫는 “대지로 요를 삼고 창공으로 이불을 삼아 입은 옷은 흙이 묻든지 말든지 쫄아드는 창자야 끊어지든지 말든지 오직 하나 집을 떠날 때 작정한 마음으로”라고 하는 내용으로 암태도 소작쟁의를 보도하였다. 당시 암태도 소작농민들의 절박한 투쟁상황의 일단을 다루어 여론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목포의 노동단체와 청년단체들도 아사동맹을 맺고 투쟁하는 암태소작회의 소작인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이들은 식량지원과 자금제공은 물론 목포사회의 여론을 조성하여 지주측에 압력을 가했던 것이다. 서울·광주·목포 등지의 한인 변호사들은 무료변호를 자청하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노농총동맹은 서울에서 연설회를 개최하여 사건진상을 폭로하는 동시에, 암태도 소작쟁의에 대한 지원을 전국의 노농단체에 전달하였다. 그리하여 평양노동동맹회에서는 지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여 암태도 소작쟁의를 직접 보조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암태도 소작쟁의가 사회문제로 대두되어 세인의 관심을 끌게되자, 일제는 더 이상 쟁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중재에 나섰다. 그 결과 8월 30일 목포경찰서장실에서 일제 관헌측을 대표한 전라남도 경찰부의 古賀 고등과장의 중재로 문재철 지주와 소작인을 대표한 박복영이 참석한 가운데 다음과 같은 타협을 보게 되었다.

① 지주 문재철과 소작인회간의 소작료는 4할로 약정하고 지주는 소작인회에 일금 2,000원을 기부한다. ② 1923년 미납 소작료는 향후 3년간 무이자로 분할 상환한다. ③ 구속중인 상대편 인사에 대해서는 9월 1일 공판정에서 서로 고소를 취하한다. ④ 파괴된 비석은 소작인회의 부담으로 복구한다. 따라서 1년간에 걸쳐 전개된 암태도 소작쟁의는 소작인측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암태도 소작쟁의는 고율 소작료를 강요하는 식민성 지주에 반대하여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지주 문재철의 테러단과 일제 식민통치 권력의 편파적인 탄압에 대항하여 조직적으로 항쟁한 것이 특징이다. 조직적 항쟁의 힘은 암태소작회의 결성에 있었다. 이러한 소작농민들의 결집체로 인해 자연발생적이고 분산적인 운동형태에서 벗어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투쟁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암태도 소작쟁의의 전개양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소작농민들간의 결속력이다. 지주의 테러와 회유책이 집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작회원들의 이탈이 없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될 수 있다. 섬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소작권 이동이 원할하지 못했던 것은 결국 지주의 농간을 줄일 수 있었고, 그러한 요인으로 인해 소작인들의 결속력은 강화되었던 것이다. 나아가 투쟁방향을 설정하여 제시하고 항일 독립운동의 차원으로 승화시킨 지도부의 역량 또한 암태도 소작쟁의를 성공으로 이끌어간 주된 요인이었다.

 투쟁의 공간도 암태도 지역만이 아니라 목포, 나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것은 지주와 소작인의 갈등구조가 일제 통치권력에 대항한 민족운동의 차원으로 발전했음을 의미한다. 암태소작회는 일제 식민통치 권력의 편파적인 탄압책에 정면대응함으로써 1920년대 농민운동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특히 노동단체와의 연계과정에서 전국적인 지지와 대중성을 확보하였다. 소작회 지도부의 연계투쟁에 대한 모색과 추진은 암태도 소작쟁의에 대한 전국적인 관심을 집중시키는 단초가 되었고, 이 과정에서 민족의 공감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암태도 소작쟁의는 이후 소작쟁의를 전국으로 파급시킨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전라남도 해안 도서지방의 소작농민들을 자극하여 1925년 都草島소작쟁의, 1926년 慈恩島소작쟁의, 1927년 智島소작쟁의를 촉발시켜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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