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북 용천군 不二 西鮮農場의 소작농민들이 벌였던 일제 시기 최대의 농민항쟁으로 不二興業株式會社의 서선농장 소작인들이 주도한 것이다.382) 金容達,<日帝下 龍川지방의 농민운동에 관한 연구>(≪北岳史論≫2, 북악사학회, 1990).
李圭洙,<1920年代 後半期 不二西鮮農場 地域の朝鮮農民運動について>(≪朝鮮民族運動史硏究≫9, 靑丘文庫, 1993). 불이흥업주식회사는 1901년 오사카 상인 후지이 간타로(藤井寬太郞)에 의해 설립된 藤本合資會社가 1914년 4월 확대 개편된 식민농업회사이다. 초기 이 회사는 미곡무역을 통하여 자본을 축적하였다. 이 회사가 본격적으로 농업경영에 착수한 것은 러일전쟁 직후이다. 즉 1904년 전라북도 옥구·익산군 일대에 전북농장(소유면적 1,500정보)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농업경영에 착수한 것이다. 이후 일제 식민통치 당국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서선농장·옥구농장(1919년 설립, 소유면적 2,500정보)·철원농장(1921년 설립, 소유면적 4,000정보) 등을 연이어 설립하여 식민지 수탈과 지배를 실현하였다. 이 회사의 특질은 기간지를 경영한 동양척식주식회사와는 달리 간석지와 미간지를 개척하여 수탈농장을 세우고, 그 농장을 중심으로 수리조합을 설치함으로써 한국 농민을 수탈하고 지배하는 것이었다.
압록강구에 위치한 용천지방은 동북으로는 신의주시와 동남으로는 철산군에 인접하고, 서북으로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安東縣과 마주보며 서남으로는 황해에 연해 있었다. 특히 이 지방은 압록강과 三橋川에 의해 이루어진 삼각주였으므로 토지가 비옥하고 간석지가 발달하였다. 1912년 8월 용천지방을 둘러본 후지이는 이를 간파한 후 이 지역에 대한 간척 수리사업을 계획하고 서선농장을 개설한 것이다.
후지이는 일부 사유 토지를 헐값에 매입하는 한편 1913년 5월 평안북도로부터 용천·府羅·外下·外上面 일대의 국유 간석지와 초생지를 불하받았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자금지원으로 간척사업을 벌여 4,000여 정보의 수탈 기반을 마련하였다. 1914년 10월에는 大正수리조합의 설치인가를 얻어 농장 토지를 중심으로 인접 東下·北中面의 기간지 3,000여 정보를 포함한 총 7,000여 정보의 토지에 대한 수리사업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자금지원과 起債로 1918년 5월 마쳤다.
그 해 봄부터 불이흥업은 ① 최초 벼농사를 하여 다소의 수확을 득한 연도까지 소작료를 무료로 함, ② 최초 벼농사 다음 연도에는 소작료를 징수하되, 그 액은 수확고의 3분의 1로 하고, 그 익년도부터는 절반 혹은 정조로 할 일, ③ 소작료를 납부하는 연도부터 起算하여 만 10년의 소작권을 부여함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간석지 개간규정>을 내걸고, 각지에서 1,500여 호의 소작농민을 모집하여 이들의 자본과 노동력으로 간척지를 개간하였다. 1921년 10월에는 외하면 石串의 간석지 1,000여 정보를 더 불하받아 소작인들을 강제 동원하여 농장을 확장하고, 1927년 2월부터는 해당지역 농민들의 반발을 관권의 도움으로 저지하면서 용천·외하·외상·內中·북중·동하면 일대 4,000여 정보의 기간지를 대정수리조합에 편입시켜 조합구역을 11,093정보로 넓혔다. 이는 용천군의 총 논면적 18,500정보의 60%를 차지하는 것으로 용천지방에서 불이흥업의 규정성을 말해 준다.
서선농장은 간척지 개척농장이었기 때문에 염분이 많고 농경설비가 갖추어지지 않아 농업조건이 열악했으며, 또 농장 소작인은 대다수가 이주 농민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불이흥업은 이같은 4,114정보의 서선농장 경작지를 농장주임을 정점으로 농장주사와 각 구역 농감으로 구성된 관리지배체제 아래 16개 농구로 나누어 총 1,798호의 소작농을 관리하면서 식민수탈을 자행하였다. 농장토지가 소작인들의 자본과 노동력으로 개간되어 소작농마다 150원에서 200원의 개간비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체의 개간비를 지급하지 않고, 오히려 자의로 소작료를 산정할 수 있는 간평법을 채택하여 고율의 소작료를 징수하였다. 따라서 규정 소작료는 5할이었으나 간평법에 의한 실질 소작료는 항상 5할을 넘는 것이었으므로 소작료 산정을 둘러싼 농장측과 소작인 사이의 분쟁은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그로 인해 1929년 봄부터는 간평법을 정조법으로 변경하였으나, 이 때에도 농장측은 수세부담을 이유로 소작료를 5할 8푼으로 인상하고, 소작료 선곡을 가혹하게 함으로써 수탈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농장측은 수리조합비(수세)를 소작인들에게 전가하였다. 원래 수세는 지주측이 전담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농장측은 수세의 반액을 소작인들에게 전가한 것이다. 더구나 대정수리조합에서는 농장 간척지를 최고 수세 등급인 1·2등급으로 매겨 징수함으로써 소작인들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가뭄과 해일로 인한 무수확년에도 수세를 징수함은 물론 저수지 확장공사비까지 전가하였다. 때문에 수세의 감면(2차 쟁의)과 농장측의 전담(3차 쟁의)을 요구하는 쟁의가 일어남에 따라 1929년 봄부터 농장측이 수세를 전담하였지만, 이를 이유로 농장측은 소작료를 5할에서 5할 8푼으로 인상하는 기만성을 보였다.
이밖에도 농장측은 종자대와 비료대 반액을 소작인들에게 전가하였다. 이같은 여러 가지의 수탈로 소작인들은 농장측에 매호 70원에서 150원 정도의 부채를 지고 있었는데, 이는 평북 및 전국 소작농가의 평균 부채액 60여 원보다 크게는 배 이상 많은 것이었다. 게다가 이 부채는 한푼도 현금을 빌린 것이 아니라 모두 소작료·수세·종자대·비료대 등의 미납으로 인한 채무였다는데, 그 식민주의적 특성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농장측이 소작인 수탈과 지배를 위해 가장 강력한 무기로 이용한 것이 소작권이었다. 당초 농장측은 간척지를 소작인들의 자본과 노동력으로 개간하기 위해 소작인 모집시 10년간의 소작권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하지만 개간 초기부터 농장측은 고율 소작료를 부과하고 이에 불응하는 소작인들의 소작권을 개간비도 주지 않고 박탈하였다. 그리고 소작권을 미납금 회수 방편으로 이용하여 채무소작인의 부채를 대신 청산하여 주거나 인수하는 자에게 소작권을 이전하더니, 나중에는 소작계약을 매년 갱신하게 함으로써 소작인들의 반발을 샀다. 그리하여 소작인들의 투쟁으로 1929년 봄부터 소작기간은 3년으로 연장되었으나 이 때에도 농장측은 소작계약조건 가운데 “도당을 조직하고 농장의 명령에 반항하거나 또는 불온한 행동이 있다고 인정될 때에는 소작권을 해제함”이라고 하는 조항을 두어 소작권을 소작인 수탈과 지배 무기로 악용하였다. 서선농장의 이러한 농업조건이 바로 소작인들의 지속적인 소작쟁의를 불러일으킨 주된 요인이 된 것이다.
용천 불이 서선농장에서 최초 소작쟁의는 1925년 1월 일어났다. 쟁의 원인은 1924년 농사가 가뭄으로 흉작임에도 농장측이 간평을 불공평하게 하여 고율 소작료를 부과하고, 이에 반발하는 소작인들을 폭행하면서 소작료를 강제 징수하고, 나아가 400여 명의 소작권을 박탈한 데 있었다. 소작인들은 운동 조직도 없는 상태에서 부라면 소작인들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농장측의 소작료 징수를 방해하는 한편, 1월 17일 85명의 연명으로 ① 고율 소작료의 감면, ② 소작권 박탈의 취소 등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군청과 도청에 제출하면서 진정운동을 펴 나갔다. 소작인들의 요구는 농장의<간석지개간규정>이나 당시의 작황에 비추어 보아도 당연한 것이었으므로 도와 군 당국의 조정으로 관철되었다.
소작인들은 1차쟁의 과정에서 권익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에 따라 쟁의를 주도했던 金迪弘·朴昌烈·李在根 등의 발기로 府羅小作組合이 결성되었다. 물론 이 당시 서선농장에는 불이농장소작인조합이라는 소작인 단체가 있었지만, 이는 소작인들의 주체적 조직이 아니었고 농장측의 어용 조직이었다. 때문에 소작인들은 1925년 3월 2일 부라면 운향시 천도교종리원에서 2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부라소작조합의 창립대회를 열고, 조합장에 김적홍, 부조합장에 金承澤, 서기에 鄭彬鎬, 회계에 黃德淵 등을 선출하여 용천지방에서 최초의 주체적 소작인 단체를 조직한 것이다.
그러나 이 조합은 전체 농장 소작인들의 참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부라면 소작인들이 중심이 된 제한된 규모의 조합이라는 조직상의 취약성이 있었고, 또 농장측 소작인 단체인 불이농장소작인조합 조합장으로 있던 지주계급의 黃正憲을 고문으로 추대할 정도의 이념적·계급적 한계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농장측이 1925년 8월 조합장 김적홍을 농감으로 임명하여 이 조합을 불이농장소작인조합에 통합함으로써 와해되고 말았다.
2차쟁의는 1927년 1월에 발생하였다. 이 시기 농민운동은 일제가 토지개량사업을 중심으로 하는 제2차 산미증식계획을 본격적으로 시행함에 따라 수리조합 설치 반대 및 수세 관계 투쟁이 증폭되어 갔는데, 그런 양상은 여기에서도 어김없이 표출되고 있다. 쟁의원인은 1차쟁의 결과 조직되었던 부라소작조합을 농장측이 붕괴시킨 뒤, 1926년 말 소작료 납부고지서를 발부하면서 ① 1920·1923년도 수세연납비, ② 대정수리조합 저수지 확장공사비, ③ 무수확지 종자대 등을 가산하여 청구하고, 수세를 과다 징수하는 등 수탈을 강화한 데 따른 것이다.
이에 대항하여 소작인들은 1927년 1월 朴允寶 등 645명의 연서로 ① 大正 9년(1920)·12년(1923) 양년도 수세 연납비를 영원히 면제할 것, ② 저수지 공사비를 전부 면제할 것, ③ 무수확지 종자대를 전부 면제할 것, ④ 영구 소작권을 승인할 것, ⑤ 1정보 15석 미만 수확지의 수세를 완전 면제할 것, ⑥ 개척비는 농장에서 부담할 것, ⑦ 산업개량조합 규약에 의한 장려비를 지불할 것, ⑧ 수리조합비 등급을 속여서 징수한 금액을 반환할 것 등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농장과 군·도 당국에 제출하고 쟁의에 돌입하였다. 그리고 2월 8일 소작인 단체로 다시 龍川小作組合을 조직하여 이를 중심으로 투쟁역량을 결집하면서 쟁의를 고조시켜 갔다.
용천소작조합은 2월 20일 운향시 천도교종리원에서 500여 명의 소작농민들이 참가한 가운데 소작인대회를 열어 농장측의 부당한 처사를 규탄하면서 요구조건의 승인을 촉구하고, 재차 군·도 당국에 탄원함으로써 쟁의를 격화시켜 간 것이다. 이 소식에 접한≪동아일보≫에서도 2월 23일<용천소작쟁의에 대하야>라는 논설로써 소작인들을 외곽에서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도·군 당국의 조정으로 3월 중순 소작인들은 요구조건 가운데 ① ③ ⑦ ⑧항을 관철하고, ⑤항은 정보당 수확량이 10석 미만일 때는 수세를 면제받고, 10석 이상 15석 미만일 때는 수세의 4분의 1을 부담하며 15석 이상일 때는 종전처럼 2분의 1을 부담하기로 농장측과 타협하여 쟁의를 끝냈다. 그러나 개간비 지불, 영소작권 인정 등의 근본적 소작조건의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또 다른 쟁의는 예비되어 있었다.
2차쟁의를 전개하면서 소작인들은 농장측의 어용소작인단체인 불이농장소작인조합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권익을 실현할 조직의 필요성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27년 2월 8일 부라면 운향시 천도교종리원에서 소작인대회를 열어 불이농장소작인조합을 불신임한 뒤 용천소작조합을 결성하고, 조합장에 沈文玉·부조합장에 李在根을 선출하여 집행부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농장측의 조합분열책동에 맞서 5월 15일에는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조직을 확대 강화하였다. 즉 명망가인 黃觀河를 조합장에 추대하고, 조합의 운영 및 농장과의 교섭사무를 맡을 이사직을 신설하여 운향청년회장인 林孝峻을 선임하는 한편, 군내에 13개 지부를 설치함으로써 조직과 집행부를 확대 개편한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향촌사회에서 기반이 취약한 이주 농장소작인들이 개인 지주를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 규모의 식민농업회사를 상대로 하는 소작투쟁에서 이들의 영향력을 이용하고자 한 때문이었다. 나아가 용천소작조합을 군 단위 소작인단체로 확대하기 위한 조치였다. 따라서 용천소작조합은 이후 농장지역만이 아니라 동하·陽西·陽下面에도 지부를 설치하여 1931년 현재 용천군 내 18개 지부와 2,613명의 조합원을 가진 전 군적 소작인 단체로 성장하였고, 이들 간부들에 의해 조선농민사 군지부인 용천군농민사가 조직되는 등 용천지방 농민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용천소작조합의 초기 조직과 사업활동은 조선농민사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그것은 조직체계상 특이하게 이사직를 두었고, 사업활동 면에서도 소작투쟁을 조직하고 지도하는 외에 조선농민사 알선부 사업을 본뜬 공동판매부를 설치, 운영하였던 점에서 잘 드러난다. 1927년 9월 지부장회의 결의로써 시행된 공동판매부 사업은 생산품을 공동 판매하고, 소비용품을 공동 구입함으로써 간상배로부터 소작인들의 경제권익을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연간 1,000여 원의 수입금을 얻어 조합경비에 보탤 수 있었다. 그밖에도 용천소작조합은 1928년 10월부터 기관지를 발행하고, 각 지부에 게시판을 설치하여 소작인 교양사업과 투쟁역량 증진에 힘썼는데 이것이 강력한 소작투쟁 역량으로 작용한 듯하다.
3차쟁의는 1928년 가을부터 시작된 일제시기 최대의 노동쟁의인 원산노동쟁의를 뒤따라 일어나 그 쟁의가 끝난 뒤인 1929년 5월까지도 지속되었고, 이 때부터 신의주 출신의 사회주의자인 白溶龜가 용천소작조합의 이사로서 쟁의를 지도함에 따라 전과 다른 쟁의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3차쟁의 원인은 1928년 추수기에 농장측이 ① 간평을 불공평하게 하여 고율의 소작료를 부과하고, ② 새로 도입한 모터식 풍구를 이용하여 소작료 선곡을 가혹하게 하며, ③ 말질을 고봉으로 하여 소작료를 강제 징수한 데 있었다. 이에 대항하여 용천소작조합에서는 11월 30일 소작인대회를 열고 소작료 불납동맹을 결의한 뒤 ① 영소작권을 승인할 것, ② 개간비를 지불할 것, ③ 수리조합비를 지주가 전담할 것, ④ 소작료 조제는 탈곡현장에서 행할 것, ⑤ 재선곡 비용 일체를 지주가 부담할 것, ⑥ 묘상의 수확 부족으로 인한 손해는 지주가 부담할 것, ⑦ 소작료 양정은 도량형 법규에 의하여 행할 것, ⑧ 금년 간평에 의한 소작료 결정은 전부 고율이니 쌍방 협의하여 감제할 것, ⑨ 소작료 강제 징수는 엄피할 것, ⑩ 소작료는 정조제로 할 것, ⑪ 농장의 농채를 연부로 상환하게 할 것 등 11개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쟁의에 돌입하였다.
이러한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용천소작조합에서는 12월 7일 1,054인 명의로 평북도청에 탄원한 데 이어 조선총독부에 진정하였다. 나아가 또 용암포경찰서에서 농장측을 비호하여 백용구 등 조합간부를 소작료 불납 지도에 따른 업무방해죄로 검거한 데 이르러서는 신의주 도청과 서울 불이흥업 본사에서 시위·농성하면서 쟁의를 확대·격화시켜 갔다. 더욱이 농장측이 3월 18일 수세의 전담, 소작료 5할 8푼, 소작계약 기간을 3년으로 연장, 간평법의 폐지 등 요구조건의 일부만을 수용한<신소작계약안>을 발표하여 소작계약 체결을 강요하자 용천소작조합에서는 이를 거부하고 불경동맹을 맺은 뒤 농장측의 농사직영에 폭력으로 맞섰다.
이렇게 쟁의가 폭력적 양상으로 발전하여 가자 용암포경찰서에서는 무장경관을 파견하여 농장을 경비하면서 농사직영을 방해하는 소작인들을 검거한 뒤 조합장 황관하를 회유하여 농장측의<신소작계약안>을 승인케 하였다. 때문에 소작인들은 그에 동조하는 온건파와 반대하는 강경파로 분열되었고, 起耕期를 맞이하여 온건파 소작인들이 소작계약을 체결하여 감에 따라 쟁의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4차쟁의는 1929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전개된 광주학생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일어났다. 이 쟁의의 원인은 농장 설립의 구조적 식민성에 기인된 것이다. 소작인들의 자본과 노동력으로 농토가 개간되어 소작인들의 채권적 권리가 발생한 소작지에 대해 1930년 초 농장측이 그 동안 묵인해 오던 일체의 소작권 이동을 금지시키고 그 매매자를 조사하여 소작권을 박탈한 데 있었다. 용천소작조합에서는 이를 불이흥업 사장 후지이에게 항의하고, 소작권 이동의 승인과 개간비의 지불을 요구하였다. 이것이 거절되자 200여 명의 소작인들을 동원하여 4월 14일부터 농장사무소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하면서 쟁의에 돌입한 것이다. 그리고 용암포경찰서에서 농장측을 비호하여 농성 소작인들을 강제 해산시키자 용천소작조합에서는 불경동맹을 결의한 뒤 이를 파기한 소작인들을 응징하고 농장의 기물을 파괴하는 등 폭력투쟁으로 맞서 갔다. 나아가 5월 10일에는 500여 명의 소작인들로 농장사무소에 돌입케 하여 시위·농성하고, 강제 해산시키려는 일경과 무력 충돌하면서 식민통치권력에 대항하였다.
쟁의의 양상이 이렇게 혁명적으로 바뀌어 가자 용암포경찰서에서는 쟁의를 주도하던 백용구와 18명의 소작인들을 검거하여 지도역량을 격리시키고, 무장경관을 농장사무소에 상주시켜 위협적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런 다음 조합장 황관하를 종용하여 “소작권 이동은 친척에 한하여 승인하고, 起耕을 승낙한 자는 소작권을 복구한다”라고 하는 조건으로 타협케 하였다. 따라서 쟁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끝났다.
2차쟁의 중에 조직되어 3·4차쟁의를 지도해 왔던 용천소작조합은 조합장이 이질적 존재라는 조직상의 한계를 갖고 있었다. 조합장 황관하는 소작인들과 계급적 토대가 다른 “지주계급에 속하는 부호”였고, 또 “농민을 지도함에 있어 관청식 근검저축·부업장려·농사개량 등을 운운”할 정도로 친일적이었으며, 그 자신 “조합을 절대로 개량주의로써 온건하게 지도할 작정”이라고 천명할 만큼 개량주의적 운동론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3·4차쟁의에서 소작투쟁을 혁명적으로 발전시켜 가던 소작인들을 지도할 수 없었음은 물론 그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농장측과 타협하는 반동적 태도까지 보였다. 따라서 1928년 4월 조합공금 유용으로 제명된 임효준의 후임으로 용천소작조합에 참여하고 있던 백용구는 밑으로부터 청년들을 조직하여 조합의 이질적 존재의 제거와 혁명적 소작조합으로의 개편을 위한 조직투쟁을 전개하였다.
우선 백용구를 중심으로 한 청년 개혁파는 1930년 9월 조직을 조합장 중심제에서 집단지도체제인 집행위원제로 바꾼 뒤 1931년 3월 임시총회를 열었다. 이들은 조합에 대한 무성의를 이유로 황관하와 그 추종자들을 축출하여 조합의 이질적 존재를 제거하였다. 나아가 조합의 역원을 전원 개혁파 인물로 개선하여 혁명적 소작조합으로의 개편을 완성하여 갔다. 이와 같이 조직투쟁에서 개혁파가 승리하여 용천소작조합의 혁명성이 제고되어 가자 용암포경찰서에서는 백용구가 정주의 同仁수리조합 소작인 선동혐의로 정주경찰서에 피검되어 있던 4월 22일 황관하 일파의 노상집회 개최와 조합문서 탈취를 비호하여 조합의 분열을 획책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개혁파 소작인들은 밖으로부터 식민통치권력에 의한 외압과 안으로부터 친일적 민족개량주의자에 의해 야기된 조합 분열을 극복하고 조합의 혁명성을 지켜내기 위한 투쟁을 벌여 갔다. 즉 개혁파 소작인 800여 명은 4월 25일 신의주 지방의 사회주의 청년운동단체인 신의주청년동맹의 지원을 받아 탈취당한 조합문서를 탈환하였고, 5월 27일과 28일에는 150여 명이 평북도청에서 문서 탈환시 피검된 백용구 등 개혁파 간부들의 방면을 요구하며 시위·농성을 벌여 이들을 석방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개혁파 소작인들의 투쟁이 진정된 6월 12일 백용구를 재차 검거하여 조합의 핵심 지도역량을 축출함으로써 조합의 분열을 지속시켰다.
이와 같이 용천소작조합이 분열되어 있던 1931년 11월에 5차쟁의가 발생하였다. 쟁의원인은 농장측이 1930년 가을 추수시에 소작인들의 부채 일부를 石當 8원씩의 미가로 계산하여 변제한 뒤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미가가 폭락하자 이미 징수한 부채를 석당 6원씩의 미가로 다시 환산하여 변제하고, 그 차액을 1931년 추수시 소작료에 가산하여 징수한 때문이었다. 이는 불이흥업이 매년 계속된 소작쟁의와 세계대공황으로 인한 미가 하락으로 말미암아 1930년부터 적자 경영을 면치 못하자 이를 보전하기 위해 수탈을 강화하려 한 것이었고, 또 그것은 용천소작조합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아 취한 조치였다. 그러나 용천소작조합의 혁명성을 지켜가고 있던 개혁파 소작조합에서는 1931년 10월 27일 소작인대회를 열고 선행조건으로 개간비 지불, 소작권 매매·이동의 승인, 채무 지불유예 등을 요구하며 소작료 불납동맹을 결의하였다. 나아가 개혁파 소작인들은 농장측이 식민통치권력의 비호 아래 소작료의 강제징수를 자행하자 이에 혁명적으로 대항하여 갔다.
개혁파 소작인들은 11월 3일 용암포경찰서 경관 15명의 엄호 아래 농장 직원과 폭력배 50여 명을 동원하여 부라면 北兼洞에서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는 朴承欽·李明植·洪錫夏·金用奎 등 4명을 결박하고 탈곡현장에서 수확물을 거두어 가는 농장주임 일행과 무력 충돌하였고, 다음날 용천면 昭興洞에서도 재차 충돌하였다. 5일에는 용천면 德峯洞에서 일경의 경호 아래 소작인들을 폭행하며 소작료를 강제 징수하는 농장측에 대항해 300여 명의 개혁파 소작인들이 무력으로 일경의 무장을 해제시킨 뒤 무차별 폭행함으로써 소작쟁의를 식민통치권력에 대한 항쟁으로 발전시켰다. 이에 용암포경찰서에서는 도경찰부의 지휘 아래 인근 신의주와 철산경찰서의 지원을 받아 200여 명의 소작인을 검거하는 등 가혹한 탄압을 가하여 쟁의를 진압하였다. 따라서 1925년 농장측의 수탈에 대항하여 경제권익투쟁으로 시작된 소작인들의 투쟁은 1931년 식민통치체제에 대한 무력 항쟁으로 발전하여 끝나게 되었다.
소작쟁의를 주도하였던 용천소작조합 또한 1932년 2월 24일 해체되었다. 해체의 직접적 요인은 식민통치권력과 농장측의 협공이었다. 용암포경찰서에서는 폭력혁명적인 5차쟁의가 있은 후 쟁의를 근본적으로 봉쇄하기 위하여 사상 악화를 이유로 용천소작조합의 해체를 노골적으로 강요하였고, 또 농장측은 소작계약 갱신기를 맞이한 소작인들에게 계약의 전제조건으로 조합의 탈퇴를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조합의 분열과 5차쟁의에서 큰 희생을 치러 투쟁역량이 약화되어 있던 개혁파 조합원이나, 개량주의 노선을 걷고 있던 황관하측 조합원이나 모두 “조합의 존재는 농민을 위하여 별로 유익하지 못하다”라는 표면적 이유를 내세워 스스로 해체를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해체의 본질적인 이유는, 개혁파의 입장에서는 이미 조합의 주된 지도역량과 투쟁역량이 조직투쟁과 5차쟁의를 거치면서 붕괴된 상태에서 조합의 존립은 조합의 혁명성을 담보하지 못한 채 오히려 소작농민들을 민족개량주의자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에서 취한 조치라고 이해된다. 황관하측 입장에서는 소작농민들의 혁명적 진출로 말미암아 조합에 대한 통제력과 영향력을 상실한 마당에 조합의 존립은 무의미하며 1931년 9월 만주침략 이후 강화되는 일제의 식민지 탄압정책은 개량주의적 소작조합조차 용납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인식한 결과였다고 보인다. 따라서 용천소작조합은 조합 상층부의 이질적 존재를 제거하여 혁명적 소작조합으로 개편해 가는 시점에 일제의 교활한 조합분열책동과 탄압으로 해체되었다.
이와 같은 용천 불이 서선농장 소작쟁의의 주된 원인은 농장 설립의 구조적 식민성과 가혹한 수탈에 있었다. 농장이 이주 소작농민들의 자본과 노동력으로 개간되어 소작인들의 채권적 권리가 발생한 소작지에 대하여 농장측은 그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혹한 수탈을 자행하여 쟁의가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발생한 것이었다. 따라서 소작인들은 여러 차례 쟁의를 전개하면서 민족적·계급적 정체성을 확립하여 갔고, 그러한 주체적 역량의 성숙을 바탕으로 소작투쟁을 식민지 문제의 해결을 위한 농민적 차원의 민족해방운동으로 전환시켜 갔음은 틀림없다.
특히 노동자·농민·학생의 혁명적 진출이 눈부시게 나타나고 전체 민족해방운동이 한층 고조되던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에 이 쟁의가 앞 시기와는 다르게 폭력혁명적으로 전개되고, 조직투쟁을 통해 친일적 민족개량주의자를 축출한 것은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이같은 용천 농민운동의 질적 전환은 소작농민의 주체적 조직인 용천소작조합의 활동과 그에 참여한 사회주의 운동가인 백용구의 지도에 힘입은 바 컸다. 그러므로 소작농민운동에 있어 주체적 소작조합의 중요성은 용천소작조합 조직 이전의 운동양상을 볼 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용천농민운동은 같은 시기의 다른 지역 운동에 비해 장기간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는 강점을 가졌지만, 상대적으로 그 양상은 다소 개량주의적이었다는 한계를 내포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① 운동주체인 소작농민이 혈연적·지연적 유대관계가 박약한 이주 농민이었던 점, ② 소작조합장이 소작인들과 계급적 토대가 다른 이질적 존재였던 점, ③ 소작조합이 사회주의 계열보다는 민족개량주의적 성격이 강한 조선농민사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점, ④ 소작농민의 평균 소작지가 2.28정보로 다른지역 소작농민보다는 좋았던 점 등에서 연유하는 바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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