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1. 농민운동
  • 4) 농민운동의 전개
  • (2)1920년대 후반기
  • 다. 갑산 화전민 항쟁

다. 갑산 화전민 항쟁

 1929년 함경남도 갑산 화전민들이 일제에 대항하여 일으킨 농민항쟁이다.383) 梶村秀樹,<甲山火田民事件について>(≪朝鮮歷史論集≫下, 龍溪書舍, 1979). 한국 농민은 일제의 이른바 조선토지조사사업에 의해 토지와 그에 발생한 농민적 권리를 잃고 무권리의 소작농민으로 전락하였다. 나아가 뒤 이어 시행된 일제의 미곡 수탈정책인 산미증식계획으로 말미암아 농민층의 몰락은 더욱 심화되었다. 때문에 일제의 농업수탈정책에 희생되어 농촌을 떠나 산간벽지로 이주하여 화전민으로 전락한 농민의 수가 다음의<표 2>와 같이 급증하였다.

연 도 화전면적(정보) 화전민가(호) 화전민(인)
1916 81,702 49,161 245,626
1924 140,551 58,566 314,823
1927 249,293 134,828 697,088

<표 2>화전민 증가상황

*李如星·金世鎔,≪數字朝鮮硏究≫1(1931), 51∼52쪽.

 이같은 화전민들의 대표적 항쟁이 함경남도 갑산군 보혜면 대평리 펑퍼물에서 1929년 발생한 갑산 화전민 항쟁이다. 갑산군 화전민촌은 여러 해 동안 모여든 유랑농민들과 1928년 함경도 일대에서 이주한 수재민들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1929년 항쟁 당시에는 1,000여 명의 화전민들이 약 200호의 마을에서 촌장을 중심으로 자치조직과<洞則>을 만들어 영농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1929년 4월부터 일제는 삼림보호라는 이름 아래 혜산진 營林署 관리들을 앞세워 화전민들을 추방하여 갔다. 이에 화전민들이 저항하자 일제는 6월 16일부터 5일간 혜산진경찰서 경관 11명과 영림서 직원 6인 등 17명의 식민 관리들로 하여금 민가와 화전을 방화, 파괴하게 하였다. 식민 관리들은 63채의 가옥을 불태우고 3채를 파괴하였으며, 재배 농작물을 짓밟는 만행을 자행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500여 명의 화전민들은 경찰서·영림서 등에 몰려가 항의하는 한편, 대표를 함남도청과 조선총독부에 파견하여 진정하고, 新幹會 본부 등 사회단체와 언론기관을 방문하여 지원을 호소하였다. 이에≪동아일보≫·≪조선일보≫등 언론기관에서는 특파원을 파견하여 그 실상을 보도함으로써 화전민 항쟁을 지지·후원하여 갔다. 신간회에서도 중앙집행위원인 金炳魯를 파견하여 갑산 화전민 항쟁의 진상을 조사한 다음, 그 진상보고대회를 개최하여 일제의 화전민 구축정책을 규탄하면서 화전민 항쟁을 지원하였다.

 중앙만이 아니라 지방에서도 지원활동이 이어졌다. 각 지방 신간회 지회와 청년단체에서 후원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특히 각 사회단체 대표 34명은 갑산화전민사건대책강구회를 결성하여 지원활동을 조직화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고무된 갑산 화전민들은 붙잡힌 동지들의 탈환을 위하여 경찰 심문장을 습격하는 등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결과 화전민들은 일제로부터 1929년도 수확 보장과 白菜洞으로의 이주 허락을 약속받았던 것이다. 갑산 화전민 항쟁은 사회 각계각층이 광범위한 연대를 형성하여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한 값진 경험이었다. 나아가 이 운동은 1920년대 말기 항일민족운동의 계급적 지평을 확대하고, 그 열기를 고양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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