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1. 농민운동
  • 4) 농민운동의 전개
  • (2)1920년대 후반기
  • 라. 수리조합 반대운동

라. 수리조합 반대운동

 일제는 조선 토지조사사업을 통하여 식민지 지주제를 확립함으로써 식민지수탈체제를 갖추고,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식민지 농업수탈정책인 산미증식계획을 시행하였다. 2차에 걸친 산미증식계획은 한국을 일본의 선진 공업화를 위한 식량공급지로 삼기 위해 계획·실시된 것이었다. 농사개량과 토지개량으로 미곡 증산을 도모하여 그 증식미를 일본에 반출한다는 것이 목표였지만, 실제로는 한국인의 식량을 약탈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산미증식계획 가운데 일제가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이 토지개량사업이었다. 수리조합을 설치하여 농경지에 관개·배수함으로써 토지생산성을 높이고, 또 그것을 한국 농민의 지배와 수탈에 이용하는 수리사업은 산미증식계획의 요체였다. 때문에 일제는 조선총독부와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을 통하여 수리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갔다. 즉 자금과 기술·행정 등 여러 측면에서 친일 한국인 대지주와 일본인 지주의 수리조합 설치 사업을 지원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 대지주를 위주로 한 일제의 수리사업은 중·소 지주와 자작농민 및 自小作농민들에게는 과다한 공사비와 水稅의 부담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소작농민들에게는 수리조합구역 내의 소작료 인상과 지주의 수세 및 공사비 轉嫁로 말미암은 부담의 가중을 가져왔다.

 수리조합 반대운동은 이같은 상황에서 전개된 것이었다.384) 西條晃,<1920年代朝鮮における水利組合反對運動>(≪朝鮮史硏究會論文集≫8, 1971).
이애숙,<日帝下 水利組合의 設立과 運營>(≪韓國史硏究≫50·51, 1985).
박수현,<1920, 30년대 수리조합반대운동의 일양상-지주·소작농의 연대투쟁을 중심으로->(≪명지사론≫10, 1999).
그리하여 수리조합 반대운동은 산미증식계획 시행 초기부터 발생하여 그것이 끝난 뒤까지도 계속되었다. 1920년대 수리조합 반대운동의 상황은 다음<표 3>과 같다.

연도 창설수리
조 합 수
반 대 운 동
발생 조합수
반대운동 발생 조합명
1920 9    
1921 8 2 익옥·어운
1922 12 3 중앙·연해·영광
1923 10 7 평안·박천·함안·서천·단천·부평·연해
1924 3 5 영일·연해·익옥·단천·영광
1925 12 5 양덕·안강·장연·영광·연해
1926 14 4 동진·적성·연해·부평
1927 15 11 대정·양산·고성·송정·우두·정연·황룡·서면·익옥·
동진·부평
1928 20 14 경산·양동·임천·미림·주익·함흥·안령·부북·용인·
송정·연해·평안·부평·대정
1929 24 7 안변·언양·홍산·평안·동진·부북·함흥
1930 26 7 가양·사천·고원·부평·함흥·안변·대정

<표 3>1920년대 수리조합 반대운동 상황

*≪동아일보≫·≪조선일보≫각 연도에서 작성;이영훈 외,≪근대조선수리조합연구≫ (일조각, 1992), 10쪽.

 위와 같이 수리조합 반대운동은 1920년대 내내 전국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수리조합 반대운동의 목적은, 초기에는 설치 자체에 대한 반대투쟁이 가장 많았고, 다음은 浸水토지의 정당한 보상의 요구 등이었다. 그러나 후기에는 조합구역 내의 소작료 인상과 과다한 수세에 대한 투쟁이 많아지고, 또 조합구역의 확장에 반대하는 투쟁도 나타났다.

 투쟁양상을 보면, 초기에는 중·소지주와 자작농·자소작농이 지주회를 조직하여 관계당국에 진정하고 시위를 전개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일제의 비호로 수리조합이 설치되고, 그로 말미암아 중·소지주와 자작농·자소작농·소작농까지 피해를 당하게 되면서 투쟁양상은 격화되었다. 후기에는 중·소지주와 자작농·자소작농·소작농이 연합하여 농민조합을 새롭게 조직하거나 혹은 기존의 소작조합을 농민조합으로 확대·개편하여 투쟁을 강화하여 갔다. 즉 농민조합을 중심으로 역량을 결집하면서 수리조합을 파괴하고, 체포된 동지들의 탈환을 위해 식민통치기관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 수리조합 반대운동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황해도 재령군의 安寧수리조합 반대운동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안령수리조합은 1926년 10월 26일 황해도 載寧·安岳·鳳山郡 일대의 농경지 9,000여 정보를 대상으로 설치되었고, 그 조합장은 金鴻亮이었다. 이 수리조합은 설치 당시에도 시가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부당한 가격으로 저수지용지를 매입하여 해당 지역 농민들의 원성을 샀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토지불매운동을 벌이며 수리조합 설치에 반대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태생적으로 수탈성을 가졌던 안령수리조합에서 1928년 재령강 개수공사를 한 결과, 봉산군 西鍾面의 물이 말라버렸다. 때문에 서종면 左曲·津曲·來臨·東屯里 등의 농민들은 1928년 5월 수리조합의 설치로 말미암아 농업용수는 물론, 음료수까지 부족하다고 관계당국에 진정하고, 수리조합 사무소와 봉산군청에 몰려가 손해배상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조합측에서 요구를 거절하자, 300여 명의 서종면 농민들은 6월 25일과 26일 이틀간 조합사무소를 습격하는 등 반대운동을 격화시켜 갔다.

 특히 수리조합사무소 습격 당시 서종면 농민들은 직원들을 구타하고 집기를 파괴하면서 출동한 재령경찰서 경관 40여 명과 충돌하여 6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뿐만 아니라 재령경찰서에서 안악·신천경찰서의 지원을 받아 160여 명의 주동자들을 검거한 데에 대항해서는, 피검자 탈환을 위해 재령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식민통치권력에 직접 도전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1920년대 후반기 농민운동은 점차 폭력혁명적인 양상을 띠어 갔는데, 이는 이 시기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과 농민조합에 가담한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수리조합 반대운동은 소작농민 중심의 농민운동을 자작농은 물론 중소지주층으로까지 확대한 민족사적 의의를 지닌다. 1920년대 민족통일전선운동은 바로 이같은 농민운동의 계급적 지평의 확대 위에서 가능하였던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