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5월 1일 서울에서 노동자들의 상호부조와 ‘땀흘리는 노동자들의 인격향상과 상식발달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노동대회가 조직되었다. 노동대회도 서울·개성·평양·광주·신의주·청주·원산·연백·부여·마산 등에 지방지부를 두고 한 때 8,000명의 회원을 가졌다. 그리고 1922년 4월 이후 회장제를 집행위원제로 바꾸어 노동대회를 운영했다.399)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앞의 책, 131∼132쪽.
노동대회는 1922년 9월에 가서 사회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개혁을 했으나<자유노동조합의 취지문>을≪신생활≫에 게재하여 1923년 1월 재판을 받은 필화사건으로 이른바 ‘한국 초유의 사회주의 재판’을 받은 ‘자유노동조합사건’이 일어나서 이항발·김사민 등 여러 간부들이 검거되었다.400) 김흥수,<1920년대 노동조합조직의 발전과정>(≪한국사론≫22), 260쪽.
이후 노동대회는 노동공제회의 해산을 반대하던 車今奉 등의 잔류파와 손을 잡고 ‘전조선노농대회’라는 전국적 중앙조직의 결성을 추진하다가 실패한 후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에 합류했다.401)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앞의 책, 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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