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화요파의 조선노동연맹회와 서울파의 전조선노농대회준비회의 대립에 환멸을 느낀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북도의 노동단체와 농민단체들은 노동연맹회에서 탈퇴한 후 1924년 3월 초에 각각 ‘전라노농연맹’과 ‘남선노농동맹’을 결성했다. 특히 대구에서 열린 남선노농동맹 창립총회에서는 “경성에 있는 기성단체나 조직 또는 조직 중에 있는 단체에 대하여 금후 모든 관계를 단절한다”는 성명을 통해 서울의 중앙지도부의 파쟁을 질타했다. 남선노농동맹은<강령>에서 “노동운동의 전력을 집중하기 위하여 전국적 총단결의 촉성을 기”할 것을 주장하고 ‘전선노농단체연합기관결성교섭위원회’를 구성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울에서도 노동연맹회와 노농대회준비회 사이에 교섭이 진전되어 1924년 4월 16일 82개 단체의 대표 77명이 서울 YMCA에서 참가한 전국대회가 열렸다. 17일에는 노동연맹회·노농대회준비회·남선노농동맹의 대표 200여 명이 통일적 전국노농조직체로서의 조선노농총동맹발기회를 열었다.
1924년 4월 18일 조선노농총동맹은 서울 광무대에 참가단체 167개, 출석대표 204명으로 창립되었다. 창립총회에서 결정된 규약에 의하면, 중앙상무집행위원회와 그 밑에 총무부·재무부·교육부·조사부·편집부·노동부·소작부 등의 부서를 두도록 했다. 그리고 정기대회는 매년 4월에 개최하되 가맹단체 대의원의 4분의 1 이상의 출석으로 성립되며, 참가단체는 15명 이상의 노동자나 소작인을 가진 노농단체라면 참가할 수 있게 했다. 참가대표의 대의원 수는 회원 100명 이하의 단체는 1명, 500명까지는 2명, 1,000명까지는 3명, 1,000명 이상이면 매 1,000명 마다 1명씩 더 참가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했다.
창립대회에서 화요파·서울파 등이 총망라된 50명의 중앙집행위원을 선출하여 전국적인 통일 노농조직체인 노농총동맹이 성립되었다.407)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앞의 책, 135∼136쪽. 노농총동맹의<강령>은 “① 오인은 노농계급을 해방하고 완전한 신사회를 실현할 것을 목적으로 함, ② 오인은 단체의 위력으로써 최후의 승리를 얻을 때까지 철저적으로 자본계급과 투쟁할 것을 기함, ③ 오인은 노농계급의 현하 생활에 비추어 각각 복리증진, 경제향상을 기함”408) 이반송,≪조선사회사상운동연혁약사≫(1934), 58쪽.이었다. 이는 노동연맹회보다 훨씬 더 구체화된 계급투쟁적 성격을 반영했다.409) 윤여덕, 앞의 책, 100쪽. 노농총동맹은 1924년 4월 20일 임시대회를 열어 노동문제·소작문제·對동척문제·대≪동아일보≫문제·대각파유지연합(어용단체) 문제 등 행동방향과 당면한 투쟁방침을 토의했다.410) 김윤환, 앞의 책, 124쪽. 여기서 결정된 노동문제에 대해서는 “① 각 지방에 노동자단체를 조직하고 원조하며 각 지방 노동자 상황을 조사할 것, ② 노동운동의 근본정신과 배치되는 異流단체는 파괴할 것, ③ 강습소와 팜플렛 등으로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현저히 높일 것, ④ 노동자 임금을 최저 1일 1원 이상으로, 노동시간은 8시간제로 할 것”411)≪동아일보≫, 1924년 4월 22일.을 결의했다. 이와 같이 노농총동맹의 노선은 사회주의적 성격을 띠고 민족개량주의와 어용단체를 배격하는 태도가 명백했다. 따라서 일제경찰은 곧 임시대회의 해산을 명령했다. 이에 500∼600명의 군중은 혁명적 노동가를 부르면서 가두시위행진을 감행했다. 서울시내는 군중과 경찰이 충돌하고 30여 명의 검속자를 내고 그 중 26명이 검사국에 송치되었다.412)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앞의 책, 137쪽.
노농총동맹이 결성되자 전국 각지의 노농단체들이 연속 가입하여 한동안 산하단체가 260여 개, 회원수는 5만 3,000여 명이 되었다. 이는 노동자·농민운동의 큰 진전을 의미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지도부 내의 서울파와 화요파의 대립이 가맹단체에도 영향을 미쳐 통일적인 지도가 보장될 수 없었다. 또 여전히 같은 조직 속에 이해관계가 다른 노동자와 농민을 전부 망라했다는 것도 조직상의 커다란 약점이었다.413) 김흥수, 앞의 글, 263쪽.
노농총동맹이 이러한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내부의 공산주의자들과 많은 지방조직들은 노동자·농민들과 연계를 강화하면서 그들의 투쟁을 조직 지도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노농총동맹이 결성된 이후 각지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더욱 강화되었으며 그 혁명성과 조직성이 일정하게 제고되었다.414) 김인걸·강현욱, 앞의 책, 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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