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4월 17일 비밀리 창립된 조선공산당은 11월 무렵, 노농총동맹을 노동자단체와 농민단체로 분리하여 재조직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노농총동맹도 1925년 11월 19일 제6회 중앙집행위원간담회를 열어 노동자·농민단체를 분리하기로 결의했다.415) 김인걸·강현욱, 위의 책, 74쪽. 그 요지는 ① 노농총동맹의 가맹단체 중에서 농민단체로 따로 조선농민총동맹을 조직하고, 노동자단체는 또 조선노동총동맹을 조직할 것, ② 농민·노동 양총동맹이 완성될 때에는 노농총동맹을 해체하고 농민·노동 양총동맹연합위원회를 조직할 것416)≪조선일보≫, 1925년 11월 21일. 등이었다.
이 결의안에 따라 1925년 말부터 우선 각 지방들에서 노동자·농민연합 단체들을 분화하기 위한 조직개편 사업들이 진행되었다. 각 지방의 ‘노농연합회’·‘노농연맹’·‘노동공제회’ 등은 노농총동맹의 분립 결의를 지지하면서 각각 노동자단체와 농민단체들로 분리·재조직하는 사업들을 진행했다. 예를 들면 1925년 12월에 ‘영광노농연합회’는 ‘영광노동연합회’와 ‘영광농민연합회’로, ‘대구노동공제회’는 ‘대구노동연맹’과 ‘대구농민연맹’으로 각각 분화되었고, 1926년 초에는 ‘務安노농연맹’이 ‘무안노동연합회’와 ‘무안농민연합회’로 분화되었다.417) 김인걸·강현욱, 앞의 책, 75쪽.
한편 1926년 11월 15일 이른바 ML파인 安光泉·韓偉健 등은 사회주의운동의 이른바 ‘방향전환론’인<政友會宣言>을 발표했다. 이 선언의 내용은 ‘경제투쟁으로부터 정치투쟁으로’, ‘파벌박멸’, ‘이론투쟁’, ‘민족단일당 결성’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418) 김인걸·강현욱, 위의 책, 86쪽. 노농총동맹은 이러한<정우회선언>을 일정하게 반영하여 1926년 12월 중앙집행위원회는<조선노농운동에 대한 新政策>을 발표했다. 그 요지는 첫째 노농운동은 경제투쟁을 위주로 한 대중적 조합운동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운동조직은 소수 선각분자의 사상운동조직에 불과했다는 점, 둘째 노동자와 농민은 본래 계급적 차별성이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양자를 한 조합 내에 혼합하여 운동의 발전을 저해했으므로 앞으로 分盟을 한 뒤 두 동맹 사이의 협조기관을 설치해야 한다는 점, 셋째 종래에는 정치투쟁을 부정해왔으나 이후에는 노동자대중의 정치의식을 향상시켜 적극적 정치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점 등이었다.419) 강만길,≪고쳐쓴 한국현대사≫(창작과 비평사, 1994), 59∼60쪽.
노농총동맹은 이상과 같이 지방의 노동자·농민연합단체의 분화와 신정책에 기초하여 1927년 9월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노농총동맹’으로 분리 개편되었다. 분리될 때 노동총동맹의 경우 가맹단체는 156개, 회원은 2만 600여 명이었다. 이것은 노동자·농민단체의 조직적 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큰 전진을 의미했다.
노동총동맹은 노농총동맹의 활동을 계승하여 수많은 노동쟁의를 조직 지도했다. 그러나 일제의 집회금지와 ‘제3·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중앙간부가 검거됨으로써 노동총동맹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이 사이에 잠입한 노동총동맹 지도부의 개량주의적 경향은 일제 경찰의 탄압을 반대하여 강고히 투쟁하지 않거나 파업투쟁에 궐기한 노동자들에게 타협을 설교하거나 조정안을 제기하고, ‘상업회의소’와 경찰 등에 탄원이나 중재를 요청하는 데 이르렀다. 그러나 노동총동맹 지도부가 개량주의적 노선에 빠졌다고 해서 그에 소속된 지방조직들과 일반 맹원들이 모두가 개량주의에 기울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많은 지방조직들과 맹원들은 지도부의 개량주의적 입장과는 달리 혁명적 진출을 강화했으며 일부 지방조직들에 참가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도 그 조직을 혁명화하기 위하여 투쟁했다.420) 김인걸·강현욱, 앞의 책, 75∼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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