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4. 형평운동
  • 4) 형평사의 조직
  • (4) 하위단체의 조직과 활동
  • 가. 형평청년회

가. 형평청년회

 전국 각지의 형평사는 자매 단체적인 성격을 가진 형평청년단체들을 따로 조직하였는데, 전국에서 조직된 형평청년단체는 자료에서 볼 수 있는 한 모두 망라하면,<표 2>에서 보듯이 그 수는 49개다.

연 도 1924 1925 1926 1927 창립년월일 미상
상반기 하반기 상반기 하반기 상반기 하반기 상반기 9
단체수 3 1 3 14 14 4 1

<표 2>연도별 형평청년회 조직상황

*상반기는 1월에서 6월, 하반기는 7월에서 12월까지임.
*명확한 창립시기를 알 수 없었던 홍성신진청년회·고성형평청년회는 신문기사를 토대로 각가 24년 하반기, 25년 하반기로 취급하였음.

 조직 시기를 보면 형평청년단체들이 가장 집중적으로 출현한 시기는 1926년이었다. 즉 전체 49개 단체 중에서 1925년 하반기에 전체의 20.8%에 해당하는 14개 단체가 결성되었는데 이듬해 1926년 상반기에 결성된 단체를 포함하면 그 수는 28개로써 50%를 넘는 높은 비중을 보이고 있다. 전반적으로 보면 이들 단체들은 1924년 하반기에 시작되어 1927년 상반기에 이르기까지 조직되었는데, 그 중심이 되었던 시기는 1925∼1926년의 두 해임을 알 수 있다(물론 형평청년단체는 전국적으로 49개 이상이 조직되었음은 틀림없지만, 대체적인 추이를 파악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1925∼1926년은 또한 형평지분사 조직이 활발하였던 시기로, 즉 형평사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다.

 형평청년단체들을 지방별로 분류해 보면, 경남 15개, 충남 12개, 경북 10개, 전북 6개, 전남 3개, 경기 2개, 강원 1개 등이었다. 이러한 지역별 분포도는 형평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지역을 동시에 나타내 주고 있다.

 창립 당시 형평운동가들은 형평운동의 중점을 ① 신분차별 철폐와 차별자에 대한 규탄, ② 사원의 경제적 이익과 상호간의 친목과 교육 등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각지의 운동가들은 창립시부터 운동노선을 둘러싸고 분열과 합동을 거듭했는데 이에 따라 상당수의 운동이 고립적이고 분산적인 형태를 띠고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일정한 반성과 비판을 토대로 형평운동가들은 형평사원들의 당면 이익 투쟁에만 전 역량을 집중하는 것은 계급해방과 민족해방운동으로서의 형평운동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형평운동의 각 부문에서 활동할 투쟁분자를 양성, 훈련시키기 위하여 무산청년을 대상으로 형평청년단체가 활발히 결성되었다. 최초의 형평청년회는 형평사 지도부의 파벌싸움이 한창이던 1924년 3월 31일 진주본부에서 결성되었다. 이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중심의 사회과학 연구, 학술강연이나 토론회의 개최, 신문이나 기관지의 간행을 통한 지식과 교양의 연수 및 계급의식의 고양과 촉진에 집중적 역량을 경주하였다.604) 충남 각지에 형평청년회(德山·海美·瑞山·泰安·保寧)가 현사회의 불합리에 대하여 교양과 단결의 힘으로 형평운동의 전위대가 되기를 힘씀이라는 선언을 한 것(≪동아일보≫, 1926년 2월 29·30일;≪조선일보≫, 1926년 1월 27일,<忠南 各地에 衡平靑年會>), 경남 咸陽형평청년회가 ①우리는 생활 향상의 최고 이익을 획득할 때까지 투쟁하기로 함, ②우리는 형평청년의 교양을 목표로 階級戰에 前衛가 되기를 목적함, ③우리는 합리적 사회를 건설하기로 함(≪동아일보≫, 1927년 6월 10일,<衡平靑年創立>)을 강령으로 내걸었던 것이 그 적절한 사례일 것이다.

 형평청년회가 여러 지역에서 폭발적으로 만들어지자 연합활동이나 연맹조직체가 조직되었고 이어 이들 형평청년단체의 전국조직체로서 1925년 12월 20일에는 조선형평청년총연맹이 ‘형평대중의 전위를 양성키 위하여’라는 사상단체적인 강령을 내걸고 결성되었다.

 전반적으로 젊은층의 사원이었던 이들은 활동전반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면서 점점 형평운동의 중추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형평운동뿐만 아니라 사회운동 전반의 현안문제를 다루는 등 운동의 활동범위를 확대시켜 나갔으며, 형평운동 전반에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특히 이들은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변혁을 지향하는 입장이었고 다른 사회운동단체 특히 청년단체·사상단체·노동운동단체와 관계를 맺으며 협력 활동하였다. 이러한 젊은 형평사원 중심의 급진세력이 성장하게 되면서 형평사내의 급진파와 온건파의 대립은 필연적이었다. 형평청년 사원들의 다른 사회운동으로의 활동범위의 확대와 다른 사회운동단체들의 협력과 지원은 많은 지역에서 형평운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지만, 한편으로 그러한 단체와의 밀접한 관계는 역설적으로 형평청년회의 해체를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27년 신간회의 창립으로 상징되는, 각 사회운동단체가 투쟁방법을 전환시키려 하는 시기에 이르면, 朝鮮靑年總同盟에서는 단일청년단체 조직을 만들기 위하여, 형평청년단체에게 해체하여 일반청년단체에 가입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형평청년총연맹은 1928년 4월 26일 형평청년총연맹 제4회대회에서 “청년운동을 단일적으로 행하려면 청년기관을 분립하는 것은 양책이 아닌데다 객관적 정세는 청년동맹조직에 항상 지장이 된다”고 하여 정식으로 해체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하여 형평청년연맹은 만 4년만에 해체되고 그 대신 형평사내에 청년부를 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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