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衛團은 1925년 1월 10일 서울에서 “① 우리는 우리의 생활 안전을 圖할 일, ② 우리는 우리의 직업을 침해하는 자를 적극적으로 방어할 일, ③ 우리는 互相間의 親愛 扶助를 도할 일”을 강령으로 내걸고 결성되었다. 그리고 각 도와 각 군에 지부를 조직하기로 하고, “외부압력에 대해 단호히 대처할 것, 파벌싸움을 벌이는 사람들을 응징할 것, 파벌분열을 극복하여 40만 사원의 단결을 공고히 할 것”을 결의함으로써, 반형평운동과 형평운동의 분열에 반대하는 입장을 뚜렷이 하였다.605)≪조선일보≫, 1925년 1월 11일,<衡平社의 正衛團>. 이렇게 보면 정위단은 총본부 지도부의 파벌싸움에 불만을 가진 젊은 사원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별동조직, 행동조직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정위단이 파벌싸움을 벌이는 지도자들에게 압력을 가하려는 의도 아래 결성되었지만, 총본부와 대립하거나 갈등을 빚지는 않은 것 같다. 총본부 간부들도 공개적으로 정위단의 활동을 지원해 주었으며, 정위단의 집행위원 가운데에는 중앙집행위원을 겸하는 자도 있었다. 이렇듯 정위단은 그 독자성을 인정받으면서 총본부와 협조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그러나 1926년 9월의 중앙집행위원회의 토의안에 정위단 부흥촉진 문제가 상정된 것으로 보아, 정위단의 실제 활동은 이미 그 전에 중지된 것으로 보인다.
정위단과 형평청년회는 파벌대립에 반발하는 젊은 활동가들이 주도했으며, 형평운동의 발전을 추구하고 진보적인 성향을 보인다는 점에서 비슷하였다. 그러나 조직의 성장과정과 활동면에서 보면 형평청년회는 각 지역의 분사로 확산되면서 젊은 사원들의 독자적인 공간으로 오래 동안 조직을 유지한 반면, 정위단은 경성총본부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대중화에 실패하고 조직도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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