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4. 형평운동
  • 6) 형평사의 해소
  • (2) 형평사내 급진·온건파의 갈등
  • 가. 형평사 조직개편과 신강령의 채택

가. 형평사 조직개편과 신강령의 채택

 1927년 9월 13일의 전라북도 형평대회에서 “여러 가지 운동이 방향전환하는 이 시기에 형평사도 조직론을 충분히 할 필요가 있다”는 당시 사회주의운동계의 신경향에 대응하는 결의가 있었다. 이러한 지방에서의 움직임들은 1928년 4월 25·26일에 개최된 형평사 제6회 전국대회의 주요 현안이 되어<組織改編>과<新綱領>을 채택하였다. 조직개편에 있어서는 종래의 형평사 조직인 자율적인 지분사의 연합체, 즉 자유연합제에서 중앙집권제로 개편하여 각 지방의 형평사는 형평사지부로 바뀌었다. 동시에 衡平靑年總聯盟을 해체하고 총본부 안에 청년부를 설치하였다. 이같은 조직개편은 사회운동계의 방향전환론의 영향을 받은 조직개편으로, 중앙과 지방을 유기적으로 통일하는 중앙집권체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때 채택된 형평사의 운동준칙이라고 할 수 있는<신강령>은 다음과 같다.

① 我等은 경제적 조건을 필요로 하는 인권해방을 근본적 사명으로 함.

② 我等은 아등 자신으로 단결하여 형평운동의 圓滿과 單一의 促成을 기함.

③ 我等은 일반사회단체와 공동제휴하여 합리적 사회건설을 기함.

④ 我等은 본 계급의 당면한 실제적 이익을 위하여 투쟁함.

⑤ 我等은 본 계급의 훈련과 교양을 기함(≪동아일보≫, 1929년 1월 4일,<衡平運動, 中央集權制-新宣言과 綱領發表>).

 이렇듯 형평사는 제6회 전국대회에서 당시 사회주의 운동단체들이 거의 그러했듯이 신강령을 채택하고, 방향전환론의 영향을 받은 조직개편을 이루었다.

 창립시의 형평사 主旨는, 백정차별의 철폐화와 함께 상호부조와 친목 및 단결, 품성의 향상, 교육 등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것은 1920년대 초에 조직된 단체들의 전반적인 특성인 실력양성주의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후 점차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분립운동이 진행되면서 사회주의자들은 상호부조적 단체에서 무산계급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신단체들을 독자적으로 조직하였으며, 이와 아울러 재래의 단체들도 무산계급적 운동의 색채를 농후하게 띠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강령도 계급관계에 입각한 ‘신사회 건설’, ‘계급의식의 각성과 일치단결’이라고 하여 사회주의적 성격이 현저하게 강조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주의자들의 계급지상주의적 관점을 받아들인 것이 급진파였다. 제6회 전국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은 이러한 급진파의 주장을 일정하게 반영하여, 온건·급진 양파의 주장을 강령상으로서 조화시키고자 노력했던 흔적이다.

 또 이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집행위원도 온건·급진 양파의 인물들로 안배되었다. 그리하여 적어도 형식적으로나마 총본부의 권한이 대폭 강화된 조직 틀에서 초기부터 활동하던 온건한 형평운동가와 새로 부상한 젊은 급진적 운동가들이 지도력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형평사는≪동아일보≫가 “제6회 전국대회 이후 형평사는 인권해방운동에서 민족 및 계급운동으로 전환하려고 하고 있다”고 평가하였듯이, 종래의 백정의 신분해방운동과 아울러 일반사회 운동단체와 제휴하여 민족운동 내지 사회주의운동 등 본격적인 대중운동으로 나아갈 태세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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