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회연합회는 이미 기성회 시기에 ① 사회를 혁신할 것, ② 세계에 지식을 광구할 것, ③ 건전한 사상으로 단결할 것, ④ 德義를 존중할 것, ⑤ 건강을 증진할 것, ⑥ 산업을 진흥할 것, ⑦ 세계문화에 공헌할 것 등 7대 강령을 발표하였다. 지식을 구하고 덕의를 존중하며 건강을 증진한다는 것은 ‘수양’을 가리키고, 사회혁신과 산업진흥은 ‘사업’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처럼 청년회연합회는 사업과 수양을 청년회의 주요 목적으로 하였다.639) 하지만 청년회연합회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安廓은 수양을 보다 중요하게 여겼으며, 사업 또한 ‘수양을 위한 사업’이라고 인식했다(안확,<청년회의 사업>,≪아성≫1, 1921년 3월, 23쪽).≪동아일보≫는 청년회의 사명으로서 친목-청년의 단결, 수양-정치상의 훈련을 청년회 생활을 통해 실험하고 체특함, 지식교환-신문·잡지 등의 공동구독 및 토론회·강연회 개최와 활동사진·연극의 상영, 체육증진-국가 사회의 힘과 관련하여 체격 양성, 공공적 사업-근검저축 및 산업장려·공동구매 및 공동조합 등 공동제도 건설을 통한 지방발전 공헌 등에 둘 것을 주장했다(≪동아일보≫, 1920년 5월 26일, 사설).
청년단체에 대해 비정치성을 요구하고 수양이 강조된 것은 이미 황성기독교청년회 때부터였다. 또한 安昌浩가 세운 청년학우회는 “무실·역행·충의·용감 4대 정신으로 인격을 수양하고 단체생활의 훈련에 힘쓰며, 한 가지 이상의 전문학술이나 기예를 반드시 학습하여 직업인으로서의 자격을 구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일부 청년단체들은 청년학우회 운동을 계승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640) 개성의 고려청년회는 자신의 會歌에서 “무실과 역행을 목적삼아 자강·충실·용감하게 서로 도와가세”라고 하였다(≪동아일보≫, 1920년 6월 26일).
1921년 4월 청년회연합회 제2회 총회에서는 연합회 헌장 일부를 개정하는 한편 연합회의 기관지≪我聲≫의 편집담당인 安廓의 저서≪자각론≫과≪개조론≫이 연합회의 이름으로 간행된 것에 대한 비판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이를 계기로 총회에서는 최초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논쟁이 벌어졌다.
1922년 4월 청년회연합회 제3회 총회에서는 두 개의 건의문이 제출되었다. 하나는 상해파 사회주의 세력과 관계를 맺고 있던 張德秀의 건의문으로 “조선은 아직 혁명시기가 성숙하지 않았으므로 문화계몽운동을 통해 민중의 경제적 생활수준의 향상과 민족의 잠재력 육성”에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하나는 서울청년회와 무산자동맹회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자 金思國의 건의문으로, 정치문제로써 “혁명적 투쟁방식에 의한 완전한 독립국가의 달성”을 주장했다.641) РЦХИДНИ Ф.495 О.135 Д.96, 김사국,<고려공산단체 약사>, 4∼5쪽. 김사국이 제출한 내용의 골자는 혁명적 투쟁에 의한 조선의 완전 독립, 소비조합과 노동조합 조직, 학교에서 조선어로 교수, 노동자·농민학교 개설과 교사 양성 위한 사범학교 개설, 민주집중제에 의한 청년회연합회 재조직, 연합회의 대표성을 집행위원회에 부여할 것 등이었다. 이 문제는 청년회연합회 총회 기간 동안 격렬한 논쟁을 야기했다. 결국 서울청년회를 비롯한 9개 청년단체는 연합회를 탈퇴했다.
제3회 총회 이후 청년회연합회는 ‘수양’보다는 ‘사업’에 더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사업의 주요 내용은 민립대학의 건립과 조선물산장려운동·소비조합·생산조합·소작인조합의 조직 등이었다.642)≪동아일보≫, 1922년 4월 6일. 청년회연합회는 1923년에 들어오면서 민립대학기성회와 조선물산장려회를 주도하면서 지방 청년단체가 그 실행기관을 담당하도록 했다. 실행 초기에는 지방 청년단체의 커다란 호응 아래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나 약 반년만에 침체의 길로 들어섰다. 그 이유는 일제 당국의 방해공작으로 모금활동이 곤란한 데 있기도 했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1923년 3월 전조선청년당대회 이후 지방조직의 근간이 되어야할 청년단체가 ‘실력양성노선’, ‘문화운동노선’을 버리고 무산계급운동노선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년회연합회의 활동은 주로 순회강연을 위주로 한 계몽활동에 집중되어 있었다. 강연내용은 청년회연합회의 주의·강령 소개, 조선청년의 사명, 민족의식의 고취, 부인해방, 교육문제, 농촌문제, 세계대세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청년회연합회의 문화운동은 ‘선민족개조 후독립’, ‘선실력양성 후독립’을 표방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독립운동’과 거리가 먼 운동으로 독립달성 이후에나 해야 할 운동이라고 비판받기도 했지만,≪독립신문≫의 한 사설은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일제는 이러한 ‘문화운동’을 체제 내적인 운동, 더 나아가서는 친일어용적인 운동으로 유도하려 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청년회연합회를 중심으로 한 ‘문화운동’ 양상에 대해, 다른 나라에 대한 의존을 버리고 자력으로 독립하겠다는 인식에서 나온 온건노선으로, 결국은 일본의 도움과 양해를 얻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기인한 것으로 파악하고 환영하였다.643) 박찬승, 앞의 책, 290∼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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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