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 청년운동
  • 2) 조선청년회연합회와 초기 청년단체의 활동
  • (2) 초기 청년단체의 주요 활동
  • 나. 초기 청년단체의 주요 활동

나. 초기 청년단체의 주요 활동

 초기 청년단체들 가운데 일부는 해외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함경남도의 홍원(청년)구락부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했다는 혐의로 10여 명의 회원이 감옥에 가게 되었고 결국은 일제 경찰에 의해 해산명령을 받기도 했다.651)≪동아일보≫, 1921년 3월 29일. 함흥에서는 청년들이 대한청년연합회와 義勇團을 조직하고(1920년 5월) 연락부·재무부·금원모집부·교통부 등을 설치하고 “우리 조선민중이 어찌 포학한 일본의 통치하에서 망국민족으로 살 수 있으랴. 우리는 피눈물을 뿌리고 광복사업을 위하여 힘쓰자”는 주장의 글을 등사하여 선전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652)≪동아일보≫, 1921년 3월 13일.

 초기 청년단체의 주요 사업 가운데 하나는 교육사업이었다. 청년단체들은 강습소나 야학을 운영함은 물론 학교에 준하는 청년학원도 경영했다. 당시는 입학난이 전국적으로 사회문제가 되었을 정도로 학교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학교에 다닐 나이를 초과하거나 학자금 사정 등으로 학교교육에 접근하지 못하는 청소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더욱이 전국의 문맹률이 90%에 달했다. 따라서 교육사업은 지식청년들이 주요 구성원인 청년단체에서 조선의 교육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야학은 대체로 두 가지 형태로 운영되었다. 하나는 일반 노동자를 대상으로 생활상 필수적인 한글과 산수·일어 등을 주로 가르치는 경우와 다른 하나는 보통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산술과 법학·지리·역사·상업·부기·경제대요·영어 등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특히 후자를 마친 학생 가운데 일부는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경우도 많았다.653) 위와 같음. 천도교청년회 김해지부의 경우 야학에 필요한 재정 총 400원 가운데 200원은 학생(150명)의 월사금으로 충당하고 나머지 200원은 청년단체에서 부담했다.654)≪동아일보≫, 1921년 9월 19일. 강사는 모두 명예직으로 하였고 과목마다 강사를 두었다. 수신·역사·商事要項·경제대요는 崔瑗浩, 일어·산술은 일본인 井上嘉六, 조선어·한문은 盧百容과 林鍾翰, 理科는 安孝駒, 농업·習字·작문은 張洪律, 지리·창가는 尹炳仁, 부기·산술은 朴基洪 등이었다. 이들 가운데 최원호·노백용·안효구(안광천) 등은 1923년 이후 사회주의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초기에는 노동야학과 함께 영어야학도 많았다는 점은 특이하다. 아마도 1921년 11월 워싱턴회의를 전후한 시기까지는 미국에 대한 기대가 상당히 컸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기독교 청년단체들이 영어야학 내지 영어강습회를 많이 열었다.

 교육사업의 대부분은 보통학교의 교실이나 지역사회의 공동시설을 이용했다. 더욱이 운영비 곤란으로 매우 불안정했기 때문에 재력 있는 간부나 지방 부호의 일시적인 도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청년단체들은 연극·음악·강연 등을 열어 스스로 재원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청년단체는 정기적인 토론회와 강연회를 열어 회원의 지식을 계발하였다. 이는 이미 1900년대 계몽운동 시기부터 각종 계몽단체에서 중심적으로 전개하던 사업이었다. 강연회와 토론회는 회원의 수양과 훈련, 대중의 계몽수단으로 여겨졌다. 강연자들은 청년단체의 지도자는 물론 국내외의 선진적인 사회운동가들로 구성되었다. 강연회와 토론회의 주제는 주로 청년회의 목적 및 사업계획·현대 사조·여성문제·자본과 노동·지방발전과 민족의 장래 등 다양한 내용들이 취급되었다. 1921년 중반 이후부터는 자본과 노동문제·여성문제·조선의 현실과 현대사상 등의 주제가 자주 등장하며 마르크스(Karl Marx)·크로포트킨(Pyotr Alekseevich Kropotkin) 등의 이론도 자주 등장했다.

 강연회는 저녁에 2∼3시간씩 계속되었고, 자유등단의 기회도 주어졌으며 독창, 바이올린 연주, 피아노 연주 등 근대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강연회에는 500∼1,000여 명에 달하는 청중들이 참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당시 새로운 지식과 문화에 목말라하는 청년과 일반대중들의 욕구를 잘 알 수 있다.

 청년단체는 체력도 민족의 실력이라는 관점에서 각종 체육활동을 벌였다. 그들은 자주 운동회를 열었으며, 여타 지역의 청년회와 야구·정구(테니스)·축구 시합을 열었다. 이러한 행사를 통해 지역간 청년들은 교류를 활발하게 전개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계절에 따라 행해지는 씨름·윷놀이 등 전통 체육과 놀이를 정기적으로 열었다. 이와 함께 아마추어 연극이나(이를 보통 素人劇이라 했다) 음악·무도회·활동사진영화상영·야유회 등도 가졌다. 특히 체육활동이나 오락활동은 교육활동이나 청년단체 재정을 보충하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는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