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3월 서울에서 전조선청년당대회가 개최되었다.655) 전조선청년당대회는 1923년 3월 24일부터 29일까지 6일 동안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대회에는 3만 명을 대표하는 94개 청년단체의 대표 154명과 개인참가자 50여 명이 출석했다. 청년당대회는 1922년 봄 이후 사회주의 청년들이 민족혁명적 청년단체를 결성하기 위해 노력한 산물이었다. 1922년 9월에는 고려공청 중앙총국이 국제공산청년동맹의 지원을 받아 민족혁명청년단체를 만들기 위해 서울청년회를 표면에 내세워 ‘전조선청년대회’를 개최하기 위한 준비활동에 들어갔다. 이는 고려공청 중앙총국 책임비서 李英과 고려공청에 일시 참가하다 탈퇴한 김사국 그룹이 연합하여 ‘고려공산동맹’을 결성한 뒤 ‘전조선청년당대회’로 변경하였다.656) 전조선청년대회가 전조선청년당대회로 변경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박철하,<1920년대 전반기 ‘중립당’과 무산자동맹회에 관한 연구>(≪숭실사학≫ 13, 1999).
전조선청년당대회는 민족혁명적 청년단체를 결성하기 위해 소집된 것이었다. 주최단체의 25%가 종교청년단체였으며, 준비위원 9명 가운데 5명이 종교청년단체의 대표자였다.657) 이애숙,<1922∼1924년 국내의 민족통일전선운동>(≪역사와현실≫28, 1998), 110쪽. 청년당대회 준비위원 韓愼敎는 “해방과 건설은 파괴의 과정을 밟아야 하나 동일한 처지에서 충돌과 배척만이 그 유일한 방법은 아니므로”, “자유가 없고 온갖 것에 구속을 거듭한 우리 조선에서는 일정한 시기에 어느 정도까지는 협동전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종교와 비종교의 간격과 지방적 색채의 구별을 초월”하여 조선 현실의 중대문제를 해결하려는 공통점에서 함께 모여 논의할 것을 호소하였다.658) 한신교,<전조선 청년에게 訴하노라>(2)·(3)(≪동아일보≫, 1923년 3월 15·17일).
청년당대회는 고려공청 중앙총국과 고려공산동맹(서울파)의 청년 사회주의자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어갔다. 그들은 각 분과회의에서 ‘온건파를 압도하고 계급의식의 고취와 공산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데 주력했다. 청년당대회에서는 청년단체문제에 대하여 ‘청년단체를 근본적으로 개조하여 대중적 해방운동의 전위대’로 만들기로 결의했다. 즉 민족혁명적 청년단체의 결성이란 ‘마르크스주의 아래 청년단체를 새로이 통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청년당대회는 “민족주의 반대”, “민족적 투쟁을 경제상 계급투쟁으로 전환”하자고 주장하면서,≪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상해파 우익과 민족주의 세력이 연합하여 전개한 물산장려운동을 ‘개량주의 노선’으로 규정하고≪동아일보≫비매동맹을 결의했던 것이다. 또한 ‘무산대중 계급의식의 고양과 공산주의 선동’이란 관점에서 종교를 절대로 부인한다는 결의는 당연한 것이었다.659) 李 江,<조선청년운동사 고찰>(중)(≪현대평론≫1-9, 1927년 10월), 20∼21쪽.
박철하, 앞의 글(1999), 58쪽. 즉 그들은 계급투쟁을 통해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려는 방법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660) 이애숙, 앞의 글(1998), 111쪽.
그렇다고 청년당대회의 결의가 민족통일전선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기 때문에 나온 결과는 아니다. 당시 사회주의 청년들은 일제의 식민지 억압이란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세력 안에는 혁명적 조류와 타협적 조류가 있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했다. 더욱이 당시 사회주의 청년들은 “계급적으로 자각한 선구자를 적극적 활동적 전투적으로 조직”하는 것을 가장 긴급한 문제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661) 주종건,<무산계급과 물산장려운동-나공민군의 ‘물산운동과 사회문제’ 및 기타에 대하여>(12)(≪동아일보≫, 1923년 4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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