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당대회에 참가한 지방 청년단체의 대표자들은 청년단체를 적극적으로 변화시켜 갔다. 지방 곳곳에서는 공공연히 “자본주의 사회의 착취·피착취 관계를 없애는 운동에는 무산청년이 그 전위로 나서야한다”는 주제의 강연이 행해졌다.662) 정우영,<청년의 역사적 사명>(≪동아일보≫, 1923년 8월 5일). 이 글은 1923년 8월 1일 서울에서 북성회가 주최한 강연에서 순회강연단의 한 사람인 정우영의 강연이다. 노동자·농민운동이 증가하는 가운데 사회주의 청년들은 사회주의 사상단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1923년 9월에는 서울·김해 등지에서 국제청년데이기념식 및 기념강연이 열렸고 사회주의와 청년운동의 관계에 대한 선전이 행해졌다. 서울청년회는 선전문을 지방의 청년단체 및 노동자·농민단체에까지 배부하였다.663)≪동아일보≫, 1923년 9월 2·4·9일. 고려공청의 사회주의 청년들은 국제청년데이를 계기로, 합법적인 청년단체로서 무산계급 청년의 교양과 단결을 목적으로 18세 이상 30세 이하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경성신흥청년단’을 만들려고 했으나 일제 경찰에 의해 금지당했다.
조선총독부는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단속방침을 강구해야 할 지경이었다. 1923년 7월 新庄 고등과장은 “서울의 학생과 노동자들이 민족독립운동 같은 것은 주의하지 않고 主義的 사상을 무한정 느끼고 생각”하고 있음을 우려했다.
1923년 4월 청년회연합회 제4회 정기총회에는 고작 31개의 지방 청년단체 대표 47명이 참가했을 뿐이었다. 더욱이 그 자리에는 청년당대회에 참석했던 10여 개 청년단체의 대표 20여 명이 참석하여 청년당대회와 제휴하지 않은 이유와 청년회연합회와 물산장려운동의 관계를 따지는 한편 간부를 비판하고 헌장을 개정하자는 주장을 폈다.664)≪동아일보≫, 1923년 4월 2·4일.
<朝鮮靑年會聯合會第四會定期總會開催件>(京高秘 5495號, 1923년 4월 14일).
청년당대회를 계기로 청년운동의 중심세력이 무산계급운동으로 집중되었다. 청년회연합회는 지방 청년단체의 지지기반을 상실해 갔다. 청년회연합회는 스스로를 변화시켜야만 했다. 청년회연합회는 제4회 정기총회에서 여전히 과거 국내 상해파세력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지방의 비타협적 분자들을 중심으로 중앙간부를 구성했다. 1923년 후반 청년회연합회는 金喆壽를 집행위원장으로 내세우고, 활동방향을 농촌문제와 노동문제를 비롯한 사회문제로 적극 확대하였다. 청년회연합회는 지방 청년단체에게 지방대회를 통해 자신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청년운동의 방향과 농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선소작인대회’ 개최 등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665)≪동아일보≫, 1923년 10월 23·28일. 하지만 지방의 청년단체 대회는 개성과 재령에서만 개최되었으며 평안북도 지방대회는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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