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조선의 사회주의운동은 이론의 미숙과 경험의 부족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공과 고려공청은 당시 러시아에 있는 교육기관, 특히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자질이 우수한 청년을 입학시켜 이론·사상적 무장을 강화하고 조직활동방법 등을 학습토록 했다. 조공과 고려공청은 이를 통해 잘 훈련된 청년들을 당원 및 공청원으로 확보하고 그들을 직업적 혁명가로 양성함으로써 당과 공청의 토대를 강화하고자 했다.
고려공청은 창립대회 이후 “가능한 한 유학생을 모스크바에 다수 파견”하고자 노력하였으나 공식적으로는 화요파가 이끌던 1925∼1926년 시기에만 두 차례에 걸쳐 26명을 공산대학에 입학시켰다. 파견된 학생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인텔리 청년들이 대부분이었으며 노동자·농민의 청년에게까지 깊숙이 파고들지 못했다.
한편 공청원에게 일정한 공산주의 교양과 훈련을 실시하여 당원으로서 정치적·사상적 준비를 갖추게 하는 제반사업은 고려공청의 가장 중요한 임무의 하나이다. 고려공청은 공청원의 사상교양사업을 위해 서울에 공청학교를 설치하고 그들의 조직규율과 훈련을 시키고자 했다. 학교는 3개월을 예정으로 책임강사제로 실시할 방침이었다. 장소는 서울에 5개소를 두며, 학교 운용비용은 국제공청에서 지원받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학교는 보통과와 고등과로 나누고, 학생들은 보통과를 학습한 후 고등과로 진학하게 되어 있으며 고등과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해 보다 깊이 있게 가르치고자 했다. 또한 학과를 학술과 실습으로 나누었는데 학술시간에는 공산주의 이론을 교양하고 실습시간에는 그 선전방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경비문제로 고심하던 고려공청은 이러한 계획을 1925년 10월 20일부로 국제공청에 보고했는데, 11월 말부터 시작된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청 제1차 검거사건으로 말미암아 일제 경찰에 폭로되었고, 결국 공청학교의 건설은 실현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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