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공청은 1924년부터 선진적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조직사업에 노력하였다. 고려공청의 합법기관인 신흥청년동맹 안에는 책임자 연구반·노동청년반과 함께 학생청년 연구반을 따로 설치했다. 학생청년 연구반은 대체로 중학교 재학생 또는 그 출신자로서 사회에 대한 상식을 가진 자들이었다. 연구반에서는 유물사관, 유산계급의 모순적 현상 등에 대해 각성시키고, 현대교육의 자본적 옹호책을 자각케 했다. 이 연구반의 책임자로는 책임자 연구반에서 파견된 세 사람이었다. 연구반원은 45명이었으며, 각 중학교 학생, 갈돕회 학생, 焰群社員, 여자고학생상조회원 및 보통회원(신흥청년동맹회원이 아닌 사람도 포함) 등으로 조직되었다.731)<新興靑年同盟事業報告>, РЦХИДНИ Ф.533 О.10 Д.1888 Л.27∼30.
고려공청은 1925년 4월 창립대회의 강령에서 교육문제로 학교 당국자는 학생운동에 간섭하지 말 것, 학생에게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를 줄 것, 종교교육에 반항할 것 등을 사업내용에 포함했다.732)<고려공산청년회 제1차 창립대표회>. 조선공산당은 창립 이전에 청년에 대한 표어 가운데서 “학생에게 집회의 자유를 허락하라. 조선인의 교육용어는 조선어를 본위로 하자. 청년운동자는 학생 속으로, 노동청년 속으로, 농촌청년 속으로 들어가자”고 주장했다. 즉 고려공청은 학생운동에 대해 직접 지도한다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공청은 서울에 있는 기존의 학생 관련단체 고학생갈돕회와 혁청단·조선학생회에 주목했다. 이후 1925년 9월 학생운동의 합법적 지도기관으로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조직했다.
고려공청은 학생운동을 지도할 기관으로 학생부를 설치하는 데 노력하였다. 6·10만세운동을 끝까지 이끌었던 李柄立이 ‘고려공청 학생부의 임시간부’였다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 학생운동 지도기관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733) 박래원,<반세기의 증언-횃불은 흐른다>(≪조선일보≫, 1964년 4월 26일). 6·10만세운동 이후 고려공청은 공청강화와 민족해방운동의 주요 역량으로 인식하고 더욱 많은 관심을 가졌다. 고려공청은 고려공산청년동맹-특히 서울 신파-과 통합을 이룬 뒤 1926년 12월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현존하는 학생단체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민중과학연구회·조선학생회 등을 적극 지지하면서 동시에 각 학교 내에 공청세포를 조직하고 그 지도를 받는 표면기관을 설치할 것을 결의했다.734)<(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회) 건의안>(1926년 12월 5일).
고려공청은 ‘학생부’를 설치하여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을 “당의 정신에 기초해 지도·훈련시켜” 학생운동을 보다 조직적으로 지도하고자 했다. 1927년 경 고려공청 각도 위원회에는 학생에 대한 주의·선전방침이 전달되었다. 그 내용은 “조선의 교육제도는 제국주의 옹호의 노예교육을 강제하고 있다는 것, 조선 민족의 민족적 존엄을 유린하고 민족정신을 마비시키기 위해 조선어 교육을 금지하고 조선역사의 교육을 폐지하고 있다는 것, 각 학교의 학생회를 자치회로 할 것” 등이었다. 이에 따라 고려공청 경기도위원회에서는 학생야체이카를 조직하고 그를 통해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지도했다. 학생운동의 주요 형태는 동맹휴학으로 나타났으며 서울과 광주 등지에서는 일정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고려공청은 1928년 3월 1일에 학생을 선두로 한 전국적 시위운동을 비밀리에 준비하였으나 신간회 중앙간부의 반대와 1928년 2월을 전후하여 불어닥친 ‘조공 및 고려공청 제3차 검거사건’으로 수포로 돌아갔다.735) (京高秘 제8306호) 경기도,<비밀결사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사건 검거 건>(1928년 10월 27일);梶村秀樹·姜德相 編,≪현대사자료≫29, 90·94쪽.
1928년 3월 고려공청은 학생부를 설치하고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통해 공청원이 직접 지도하여 각 학교 내 학생회를 자치회로 할 것, 학생을 야체이카원으로 하여 소속학교에 독서회를 조직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그해 5월부터 서울을 비롯해 일부 지방의 각 학교에 5명 이내의 독서회가 조직되었으며, “공산주의 정신의 교양, 교내 우등생 1명을 독서회에 입회시켜 책임자로 할 것, 이후 순차적으로 전국적으로 중등 정도 이상의 각 학교에 동일한 정책을 실시할 것” 등의 활동방침을 실천해 갔다.736) 梶村秀樹·姜德相 編,≪현대사자료≫29, 90∼91쪽.
고려공청은 합법 기관지≪靑年朝鮮≫제2호(1928년 7월 31일)를 통해, 각 학교의 학생회를 자치회로 변경하고 지역별 ‘학생자치연합회’를 구성하며, 학교대표자회와 학생대회를 열고 전국적 학생단체를 조직하여 분산적 투쟁을 전국적 투쟁으로 조직화하는 문제를 제기했다.737)≪청년조선≫2(1928년 7월 31일);朴慶植 編,≪朝鮮問題資料叢書≫5, 403쪽. 또한 1929년 3·1운동 10주년을 기해 민족운동과 제휴하여 학생을 선두대로 하는 대대적인 시위운동을 계획했다. 그러나 모든 계획은 1928년 6∼8월에 걸쳐 진행된 ‘조공 및 고려공청 제4차 검거사건’으로 무산되었다. 이상과 같은 고려공청의 학생운동에 대한 노력은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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