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공과 고려공청은 1926년 5월 1일을 기해 전국적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4월 말 純宗의 사망 소식이 발표되자 그의 因山日을 이용한 대대적인 시위투쟁을 전개하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이렇게 하여 6·10만세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조공 당 간부회의에서는 당 중앙위원이자 고려공청 책임비서인 권오설에게 ‘혁명적 대시위운동’의 지도임무를 위임했다. 먼저 ‘大韓獨立黨’을 조직하고 그를 통한 대대적인 시위운동을 6월 10일 전개한다는 대체적인 방침이 결정되었다. 고려공청은 총책임자 권오설을 비롯해 李智鐸·朴珉榮 세 사람의 투쟁지도부를 구성했다. 투쟁지도부는 조공 상해부와 연락을 취하고 격문과 자금의 지원을 받았다.
6·10만세 운동의 추진과정에서 권동진 등 천도교 구파 상층간부들과 제휴는 성공했으나 서울청년회·북풍회 등의 사회주의 청년과 결합하는 데는 실패했다.738) 이지탁,<독립운동과 학생-6·10만세운동을 회고하며->(≪조선일보≫, 1960년 6월 11일). 서울에서는 고려공청 학생부 임시간부 이병립을 중심으로 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조공 및 공청 학생부 프랙션의 지도 아래 학생을 주축으로 시위를 준비했다. 천도교에서 활동하는 朴來源과 인쇄직공 閔昌植이 철도연변의 지방도시와 농촌의 청년단체를 중심으로 지방조직 건설을 담당했다.739) 박래원,<반세기의 증언-횃불은 흐른다->(≪조선일보≫, 1964년 4월 26일).
그러나 6월 7∼8일에 투쟁지도부가 일제 경찰에 의해 와해되자 공청 및 조공 학생부가 실질적인 지도부 역할을 했다. 그들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중심으로 해서 서울의 연희·보성전문, 휘문고보 등의 학생 지도자들과 결합해 격문과 삐라를 살포하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비록 6·10만세운동이 많은 한계를 지닌 채 서울에 국한되어 전개되었지만 조공과 고려공청이 일부 민족운동 세력과 연대하여 반일투쟁을 실천적으로 전개한 최초의 투쟁이었다. 또한 이를 계기로 학생청년이 반일운동에서 주체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도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고려공청은 신간회 지회 결성에 매우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몇몇 신간회 지회, 즉 경기도의 서울·인천·개성, 전남의 광주·담양·목포, 장성·순천·제주, 전북의 전주·옥구·군산·정읍·부안·익산·김제, 경북의 안동·김천·영천·대구, 경남의 통영·진주, 황해도의 안악·재령·해주, 강원도의 춘천, 평북의 의주, 함남의 원산·함흥·안변에는 당 및 고려공청 프랙션이 설치되었다.740) 梶村秀樹·姜德相 編,≪現代史資料≫29, 91∼93쪽.
고려공청원들은 대체로 신간회 각 지회의 실무와 이론활동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 간사를 맡았다. 지방의 공청원들은 청년단체를 실질적으로 이끌었으며, 신간회 지회에 개별적으로 가입했다. 공청 도기관들은 전민족적 정치투쟁에 노력한다는 결의 아래 신간회에 노농계급을 가입시켜 신간회에서 실제적 헤게모니를 확보한다는 것을 지도이론으로 삼았다. 서울의 신간회 경성지회에 대해서는 중앙간부직으로 침투하기보다는 청년단체·노동단체·학생단체 등의 계급·계층운동에 주력하면서 그 역량을 가지고 신간회를 지원했다.741) 梶村秀樹·姜德相 編,≪現代史資料≫29, 100쪽. 이처럼 지방의 조공 및 고려공청의 지방기관들은 신간회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각 지역의 청년동맹들은 신간회 운동을 실질적으로 추동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경성청년회의 사회주의 청년들은 1928년 초 조선공산당 ML파에서 주장한 민족협동전선당의 보조기관으로서 ‘민족적 전국단체협의회’와 조선공산당 서·상파에서 주장한 신간회에 대한 개인 및 단체가맹제를 비판했다. 그들은 앞의 두 세력의 주장에 대해 청총과 지방의 청년단체들을 신간회에 예속시키려는 것으로 ‘계급적 자립 단체의 청산’을 기도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742)≪중외일보≫, 1928년 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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