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연구회는 1921년 12월 3일 주시경 문하에서 직·간접으로 배출된 張志暎·李秉岐·申明均·金允經·權悳奎·李奎昉·李昇圭·任璟宰·崔斗善·李常春 등이 徽文義塾에 모여, “朝鮮語의 正確한 法理를 연구함을 목적”(회칙 2조)으로 조직된 국어 전문연구단체였다. ‘조선어’의 과학적 연구를 통해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저항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국어에 대한 학술연구를 목적으로 하였던 조선어연구회의 실제활동은 연구발표회·강연회·강습회 등을 통한 국어운동이었다. 1927년 2월 8일자로 창간된≪한글≫은 정식 학회 기관지는 아니었지만 권덕규·이병기·崔鉉培·鄭烈模·신명균이 동인으로 참여한 최초의 국어연구 전문지였다. 동인지≪한글≫창간호에 실린 창간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한글’이 나았다. ‘한글’이 나았다. 훈민정음의 아들로 나았으며 이천 삼 백만 민중의 동무로 나았다. 무엇 하러 나았느냐. 조선말이란 광야의 황무를 개척하며 조선글(한글)이란 寶器의 묵은 녹을 벗기며 조선 문학의 正路가 되며, 조선 문화의 원동력이 되어 조선이란 큰 집의 터전을 닦으며, 주초를 놓기 위하야 병인 이듬해 정묘년 벽두에 나았다. … 갓난아이인 ‘한글’은 힘이 적으나 그 할 일인즉 크도다. 아득한 속에서 묵은 옛말을 찾으며, 어지러운 가운데에서 바른 學理 법칙을 찾으며, 밖으론 세계 어문을 참작하며 안으로 우리말과 글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어의 사정을 꾀하며, 완전한 문법의 성립을 벼르며 훌륭한 자전의 실현을 뜻하니 그 할 일이 어찌 끔찍하지 아니한가…
이렇게 조선어연구회의 사명을 표기법의 정리·표준어의 사정·문법 정리·사전 편찬 등임을 밝히고 있었다. 이 일들은 바로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학회로 개편된 이후 실제 추진한 사업이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도 비록 조선어연구회가 학술단체로 출발하였으나, 현실적으로 시급하게 추진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 국어통일운동에 오히려 깊은 관심을 두었다고 할 것이다. 4·6판의 팜플렛과 같은 동인지≪한글≫은 1928년 10월까지 9호가 간행되고 중지되었으나, 1932년에 창간되는 조선어학회의 기관지≪한글≫의 전신으로 볼 수 있다.
조선어연구회에서는 1926년 11월 4일(음력 9월 29일)에 훈민정음 반포 8회갑(48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고, 이후 이 날을 ‘가갸날’이라 하고 매년 기념하기로 결정하였으며, 1928년부터는 한글날로 기념하였다. 이밖에도 주목할 조선어연구회의 활동으로는 1926년부터 1929년까지 강습회와 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철자법 통일운동을 전개하였고, 1929년 10월 31일에는 한글날 기념회를 가진 뒤 李克魯를 책임자로 하는≪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한 일이었다. 또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철자법 개정 건의서>를 제출하여 조선어연구회의 주장을 관철시킨 바 있었는데, 이는 학회가 민간운동을 외면하고 일제의 권력과 결탁하여 그들이 요구하는 철자법 개정을 이루었다는 비난을 면하지 못하였다.108)金敏洙,<朝鮮語學會의 創立과 그 沿革>(≪周時經學報≫5, 1990), 59∼60쪽.
1931년 1월 10일, 조선어연구회는 총회에서 조선어학회로 개칭하고, 1932년 1월 9일 정기총회에서는 회칙을 개정하였다. 즉 학회의 목적을 ‘朝鮮語文의 연구와 통일’로 명기하였는데, 어문연구와 표기법의 통일을 학회 설립목적으로 못박았던 것이다. 이미 조선어연구회에서는 1930년 10월부터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에 착수하고 있었는데, 조선어학회에서는 이를 확인한 것이었다.
조선어학회에서는 기관지≪한글≫을 1932년 5월 1일자로 창간하였다. 동인지≪한글≫을 잇는 것이지만, 기관지로는 창간호였다. 편집을 책임진 李允宰는<한글을 처음 내면서>라는 창간사에서 이 기관지의 발간경위와 사명을 이렇게 썼다.
우리가 우리 글을 잘 알자 하는 소리가 근년에 와서 더욱 높아 간다. 우리는 하로 바삐 묵정 밭같이 거칠은 우리 한글을 잘 다스리어 옳고 바르고 깨끗하게 만들어 놓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사 년 전에 몇 분의 뜻 같은 이들끼리≪한글≫잡지를 내기 비롯하여 일년 남아나 하여 오다가, 온갖 것이 다 침체되는 우리의 일인지라. 이것마저 이어갈 힘이 모자라서 지금까지 쉬게 된 것은 크게 유감되는 바이다. 우리는 이제 시대의 요구에 맞추며 본회의 사명을 다하고자 하여 이≪한글≫잡지를 내게 된다. 이로써 우리 한글의 정리와 통일이 완성하는 지경에 이를 것을 믿는다. 무릇 조선말을 하고 조선 글을 쓰는 이로써 누가 이에 공명하지 아니할 이 있으랴. 오직 뜻을 같이 하고 힘을 어우러 말과 글이 더욱 환한 빛을 내기로 하자. 이에≪한글≫을 냄에 대하여 한 말을 하는 바이다( 李允宰,<한글을 처음 내면서>,≪한글≫1-1, 1932, 3쪽).
특히 이윤재는 한글의 정리와 통일의 완성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바로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가 지속적으로 내세웠던 과제였다.≪한글≫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극심해졌던 1942년 5월 1일자(제10권 2호, 통권 93호)로 중단되기까지 한글의 정리와 통일 및 그 보급을 위해 크게 공헌하였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어학회는 국어를 계몽·선전하였으며, 국어의 통일운동을 전개하였고, 국어사전의 편찬을 시도하였다. 즉 조선어학회는<철자법통일안>을 1933년 10월 29일 제487회 한글날에≪한글마춤법통일안≫으로 공표하였으며, 1936년 10월 28일 제490회 한글날에는≪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표하였다. 또 1941년 1월 15일에는≪外來語表記法統一案≫을 공표한 바 있다. 이와 함께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조선일보사·동아일보사 등이 주최한 하기 한글강습회를 후원하였으며, 1941년까지 한글반포기념식을 주관하였고, 비록 완성되지는 못하였으나≪朝鮮語大辭典≫을 편찬하고 있었다. 1934년 한글날에는 朝鮮語學圖書展覽會를 개최하여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학회의 연구발표회도 1930년부터 1937년 말까지 꾸준히 계속하여 학문적 성과를 알리고 있었다.109)한글학회,≪한글학회 50년사≫(한글학회, 1971), 89∼97쪽. 이처럼 국어운동을 전개하던 조선어학회는 1942년 10월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사실상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체되고 말았다.110)한글학회, 위의 책.
金敏洙, 앞의 글.
金允經,≪朝鮮文字及語學史≫(朝鮮記念圖書出版館, 1938).
≪한결 金允經全集≫2(延世大 出版部, 1985), 545∼673쪽.
朴炳采,<日帝下의 國語運動 硏究>(≪日帝下의 文化運動史≫, 民衆書館, 1969), 448∼455쪽.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