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語文學會와 震檀學會, 그리고 朝鮮音聲學會는 대체로 대학에서 국어학 또는 언어학 등을 전공한 연구자들이 참여한 단체였다. 조선어문학회는 국문학과 국어학을 함께 연구하였으며, 진단학회는 국어학뿐 아니라 역사학·국문학·민속학 등의 연구자가 참여하여 오히려 국어학자들의 활동이 저조하였다.
조선어문학회는 1931년 6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朝鮮語學及文學科 졸업생인 金在喆(3회)이 주동이 되어 趙潤濟(1회)·李熙昇(2회)·李在郁(3회)이 동인으로 참여한 학술연구모임으로, 친목과 조선어학·조선문학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경성제대는 일제에 의하여 1924년 개교하여 1929년부터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한국인 졸업생은 소수였고 특히 조선어학급문학과 출신은 몇 사람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식민지 최고학부에서 국문학과 국어학을 전공하였지만, 특히 국어학에 있어서는 조선어학회와 같은 연구단체에 비하여 짧은 연륜으로 국어연구를 주도하기는 어려웠다. 조선어문학회는 그 해 7월부터 동인지≪朝鮮語文學會報≫를 간행하여 1933년 7월까지 7호의 회지를 발간하였는데, 국어연구자로는 이희승·方鍾鉉·李崇寧 등이 참가하였다. 1933년 1월 김재철의 사망으로 위축된 조선어문학회는 동인지 제7호를≪朝鮮語文≫으로 개칭하였으나, 종간호가 되고 말았다. 비록 2년밖에 지속되지 못하였으나, 조선어문학회는 당시 최고학부 출신 국어연구자들이 과학적 연구방법을 통하여 새로운 학풍을 조성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되고, 그 관여자들은 1934년에 창립되는 진단학회에 참여하여 연구활동을 계속하였다.112)朴炳采, 위의 글, 453∼455쪽.
趙東杰, 위의 글, 165∼166쪽.
김윤식,≪한국근대문학사상연구≫1(一志社, 1984), 23∼26쪽.
1934년 5월 7일 ‘朝鮮 及 隣近文化의 연구’(회칙 2조)를 목적으로 한 진단학회가 창립되었다. 언어·문학·역사 등 한국문화에 대한 종합적 연구를 목적으로 한 국학연구단체로 출발된 진단학회에는 발기인으로 김윤경·이윤재·이희승·최현배 등의 국어연구자가 참여하였다. 그러나 기관지인≪震檀學報≫에 수록된 국어학 관계 논문은 전체 77편(1∼14집, 1934∼1941) 가운데 4편에 지나지 않았다. 국사학 논문이 39편이고, 국문학이 10편인데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는 진단학회가 주로 국사와 국문학 관계자들의 주도로 운영되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숭녕이<音攷>등 3편을, 梁柱東이 鄕歌 주석에 관하여 1편을 발표하였을 뿐이었다.113)≪震檀學會六十年誌≫(震檀學會, 1994) 참조.
조선음성학회는 1935년 4월 24일 기독청년회관에서 이희승·이극로·鄭寅燮·金善琪 등의 주도로 20여 명이 참여하여 설립되었다. 국제 학계와의 유대 강화를 목적으로 한 음성학 연구단체였다.114)≪朝鮮日報≫, 1935년 4월 26일. 金尙鎔·異河潤·정인섭이 간사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실제 국제 학계에 한국어를 소개하였으며, 국어교육을 위한 음반제작도 한 바 있다. 즉 1935년 7월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국제음성학회 제2차 대회에 김선기가 참석하여<조선어음의 만국음성부호 표기>와<실험음성학으로 본 조선어의 악센트>를 보고하였으며, 1936년 8월에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개최된 세계언어학회에 정인섭이 참가하여<조선어문과 구미 어문과의 비교>를 발표한 바 있었다. 또한 한국어 교육에 필요한 정확한 발음과 독법을 위한 음반 12매를 1935년 12월 OK축음기주식회사에서 제작하여 보급시켰다.115)金允經, 앞의 책, 625∼628쪽.
朴炳采, 앞의 글, 462∼463쪽.
≪朝鮮日報≫, 1935년 9월 24일. 그러나 조선음성학회는 발족 직후 국제 학계에 한국어를 소개하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으나, 연구 기관지조차 발행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것은 회원의 대부분이 조선어학회에 관여하였던 점으로 미루어, 조선음성학회보다 조선어학회의 활동에 진력한 결과로 짐작된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