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Ⅴ. 과학과 예술
  • 4. 체육·무용
  • 1) 일제하 근대체육의 성장과 시련
  • (2) 3·1운동 이후 문화통치와 민족체육의 성장
  • 나. 각종 경기단체의 창설과 운동경기의 활성화

나. 각종 경기단체의 창설과 운동경기의 활성화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이 문화정치로 변하면서 집회·결사의 자유가 허용되자,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각종 체육단체가 결성되었다. 사실 조선민족의 체육활동이 본격화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끌어갈 수 있는 체육단체가 부재했으므로 단체의 결성은 조선의 체육발전을 위해 매우 시급한 일이었다. 그러한 시대적 욕구는 1920년 4월 10일자≪동아일보≫사설에서 ‘체육기관의 필요를 논함’으로 분출되었다.

과거에 우리가 비록 운동에 대하야 냉정하엿슬지나 또 아모 관념을 두지 아낫슬지나 신시대의 신세계의 금일에 至하야서는 운동에 대하야 크게 열열하여지고 만히 연구도 하며 노력도 하며 장려도 하야 吾 조선에 운동열을 크게 니리키라. …吾人은 이에 장래의 운동계를 위하야 기관을 설립함이 自今의 急務요 要務니 이론보다 실제로 구체적으로 실행하여야 하겠다. 최근 경성에는 한 체육의 기관이 니러나려고 煩悶苦痛한다. 此機에 際하야 吾 조선운동계를 개탄하는 유지청년은 總히 共鳴하야 誠力을 내며 誠力을 協하야 구체적으로 기관의 설립을 期成하야 운동가를 양성하며 운동을 장려하여 萎靡不振한 현상을 쇄신하야 조선운동계의 신기원을 건할지니…(≪동아일보≫, 1920년 4월 10·12·13일, 사설<平波, 체육기관의 필요를 논함 1·2·3>).

 위와 같이 체육기관 설립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증대되는 가운데, 1920년 7월 13일에는 오늘날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가 창립되었다. 조선체육회는 서울에 그 본부를 두고 각도에 14개 지부를 설치하여 조선 체육의 통일적 발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더구나 산하단체는 아니었지만, 조선야구심판협회·조선정구협회·조선씨름협회·조선축구심판협회·조선농구협회·조선농구심판협회·고려육상경기회·조선수상경기회·조선축구협회·조선아마튜어권투연맹·경성육상경기연맹 등과 협조 조직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결과 조선체육회는 일본인의 체육단체인 조선체육협회를 능가하는 명실상부한 조선체육계를 대표하는 조직으로서 부상하였고, 1925년 2월 27일에 창립된 관서체육회와 조선체육계의 쌍벽을 이루는 기관으로 성장하였다.568)김미숙,<관서체육회의 활동이 근대체육발달에 미친 영향>(한국체대 석사학위논문, 1999).

 조선체육회는 1920년 11월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창설하였는데, 이 대회는 제1회 전국체전에 해당하는 경기대회였다. 이후 조선체육회는 전조선축구대회는 물론이고 정구·육상·빙상·자전거대회 등을 개최하였고, 1929년에는 ‘전조선경기대회’를 열어 국내 최초의 종합경기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특히 자전거경기의 제1인자인 엄복동은 늘상 일본 선수를 제치고 우승을 독차지하였는데, “쳐다보니 安昌男, 굽어보니 嚴福童이라”라는 유행가사가 불려질 정도로 그 인기가 절정이었다.569)심승구,<한국 스포츠 100년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교지≫17, 한국체대, 2000). 또한 평양에 설립된 관서체육회는 축구·정구·배구·농구·빙상·수영·탁구·육상 등의 근대스포츠와 민속경기인 씨름대회는 물론 조기운동회와 동명체조단 결성, 일광욕 보급운동과 수영강습회를 통해 민족체육과 위생보건에 앞장서는 역할을 하였다.

 위의 두 단체를 필두로 전국 각지에서는 90여 개의 지방체육단체가 결성되어 조선체육계를 이끌어 나가게 되었는데, 당시 각지의 체육단체 현황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표 1>과 같다.

서울 1개 충청 7개 전라 9개 강원 9개 함경 9개
경기 6개 경상 16개 평안 23개 황해 10개 計 90개

<표 1>3·1운동 이후 1934년까지 결성된 체육단체 현황

* 이학래,<1920년대 이후 각 지방 체육단체 결성현황>(≪한국근대체육사연구≫, 지식산업사, 1990), 276∼291쪽.

 <표 1>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체육단체는 전국에 걸쳐 골고루 결성되었다. 이점에서 1920년대는 조선체육계가 근대체육을 보급하고 성장하는 커다란 전기를 마련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평안도가 특히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여, 이 지역이 근대체육의 도입 열기가 타 지역보다 고조되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평안도가 일찍부터 무예를 숭상하던 지역적 특성이 있는 데다가 조선후기 이래 상공업을 기초한 경제적 성장을 배경으로 근대적인 교육은 물론 체육문화를 앞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의 각종 체육단체는 각기 지역민들을 중심으로 축구·농구·배구·야구·정구·육상·빙상·수영·탁구·복싱·유도·검도·자전거 등의 각종 근대 스포츠대회를 활발하게 주도해 나갔다. 또한 씨름·그네 등 민족적인 전통체육활동을 권장하는 노력도 함께 추진하는 한편, 각종 시민운동회의 개최와 보건운동과 같은 지역민의 체력과 건강을 위한 활동도 지속하였다. 무엇보다 전국 각처에서 단체의 결성과 함께 추진된 각종 스포츠대회의 개최는 한국의 근대스포츠가 전국에 걸쳐 보급되고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동시에 전국에 걸친 경기대회는 식민지 조선민중의 최우선 과제인 독립의지를 마비·약화시키는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민족체력의 향상을 통한 민족단결과 독립의지를 고양시키는 또 하나의 사회적 배경으로 작용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한편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사실은 해외동포·유학생의 모국방문경기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909년 동경유학생야구단의 모국방문을 시작으로 1920년대에 들어와 해외유학생의 방문경기가 크게 늘어났다.570)1909년 동경유학생야구단을 시작으로 1910년대 4차례, 1920년대 19차례, 1930년대 16차례, 1940년대 11차례 등으로 1920년대가 해외동포유학생의 모국방문경기가 가장 많았다(대한체육회,≪대한체육회사≫, 1965, 221∼230쪽). 주로 동경·상해·하와이 유학생이 주축이 되어 야구·축구·정구·럭비·육상·권투·농구·레슬링·빙상·자전거·무도단 등이 적게는 한차례로부터 많게는 12차례까지 방문하여 한국의 근대체육 발전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모국방문 경기를 통하여 최초로 유니폼을 소개하였으며, 운동규칙과 운동용구, 그리고 운동기술과 경기 도입에 공적을 남겼다.571)이학래, 앞의 책, 168∼171쪽. 무엇보다도 이들은 외국에서 습득한 과학적인 경기방식과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국내의 각종 스포츠 발전에 기여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