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문고와 보성전문학교를 거쳐 상업은행 소속 정구선수였던 조택원은 1927년 11월 두 번째로 조선에 공연을 온 현대무용의 거두였던 일본의 이시이의 공연을 관람하고 무용에 입신하게 되었다.620)조택원,≪가사호접≫(서문당, 1974), 34쪽. 1928년 1월 동경으로 건너간 그는 본격적인 무용수련을 쌓았는데, 1929년 봄 처녀작 ‘어떤 움직임의 매혹’을 동경에서 발표하여 그 재능을 인정받았고, 이시이무용단의 일원으로 동양의 주요 도시를 순연하였다.
1932년 이시이가 실명하면서 독립을 결심하고 경성으로 돌아온 그는 중앙보육학교 무용교수로 취임하는 한편, 무용연구소를 개설하고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621)조택원,<나의 이력서>(≪한국일보≫, 1976년 4월 6일). 1933년 2월 ‘승무의 인상’·‘우울’·‘땅에 바친다’·‘사랑의 슬픔과 기쁨’ 등으로 제1회 작품발표회를 갖는 것을 필두로 해방 이후까지 창작활동을 계속하였다.622)志村操,<조택원무용평>(≪경성일보≫, 1933년 2월 3일). 그 역시 국내는 물론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 구미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무용세계는 현대무용적 성향을 띠고 작품형상은 무용시의 흐름을 보였으나, 독자적 창조활동을 벌이면서부터는 한국적 소재에 눈을 돌려 우리 춤의 멋과 흥을 현대감각으로 여과·수용하면서 사색적이고 명상적이면서도 서정이 넘치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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