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옷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한복개량과 양복착용이다. 유교적 윤리 속에 갇혀 살던 여성들에게서 그 굴레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욕구가 일어났는데, 이는 서구화에 대한 동경과 함께 새로운 유행을 따르고자 하는 행위로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유행의 주체는 주로 여학생과 전도사·기생들이었으며, 이들은 곧바로 일반 여성들의 모델이 되었다. 시골 여성들에게 짧은 머리에 짧은 치마와 긴 저고리를 입은 신여성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 가운데서 기생들의 사치가 일반 부인들에게도 문제가 된다하여 1919년에는 개량할 기생의 의복으로 “화려함만 취하지 말고 사회의 풍기를 생각”682)≪매일신보≫, 1919년 11월 14·15일.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이런 추세 속에서 새로운 유행이 생기고 여성들의 사치가 심해지는지 1925년에는 “京城여자들에게 빛이 다른 양산과 야릇한 치마 등이 유행하는데 여염집 부인과 여학생과 기생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683)≪동아일보≫, 1925년 8월 8일.라는 기사도 보인다. 그러나 전통적인 사고와 생활습관에 젖어 살던 시골이나 일반 여염집 여인들은 우리 옷 한복을 고수하고, 양장은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도회지에서 선교사나 신여성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때까지도 주류를 이루는 것은 한복이었지만, ‘개량’이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 크기·형태·색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여성의 저고리 길이는 1900년대 전후가 가장 많이 변한 시기로 조선시대 중에서도 가장 짧고 좁아진다. 이 짧은 저고리에 대한 반응은 “남자도 手足 이외에 살이 보이면 체면을 잃었다고 하는데 하물며 여자이겠는가. 여자의 저고리는 소매만 있고 길이가 없어서 아무리 단속해도 허리가 보이므로 여자 저고리 길이를 길게 정해달라”684)≪帝國新聞≫, 1906년 5월 31일.에 잘 나타난다. 이때 저고리의 길이는 20cm 안팎이었다. 1940년대가 되면 ‘도사저고리’라는 새 유행어가 생긴다. 短小化했던 저고리의 길이가 허리까지 내려와 길어지면서 품도 넉넉해지고 배래의 곡선도 커졌으며 옷고름은 단추나 부로우찌가 유행하면서 예복 외에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치마도 변하기 시작했다. 1900년 초부터 “치마는 도랑치마로 하되 통치마로 만들어서 걸음을 걸을 때에 치마 자락이 벌어지지 않게 하라”685)≪帝國新聞≫, 1907년 6월 19일.는 요구가 제기되기 시작한다. 이후 차츰 길이가 정강이까지 올라가서 짧아지고, 자락을 막은 통치마가 등장한다. 통치마는 1920년대 이후에는 신여성과 신교인 사이에 유행하기 시작하고 이때 저고리 길이는 길어지기 시작한다. 통치마가 이용되면서 말기는 허리에 매던 것에서 어깨에 걸치는 ‘어깨말기’ 또는 ‘조끼허리’라는 것이 고안되고 또 많이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검정치마에 흰저고리는 이들에게 가장 신선하고 새로운 표상이 되었다. 신은 고무신과 洋靴가 병행된다. 이에 맞춰 버선과 양말이 혼용되는데, 버선의 길이는 치마가 짧아짐과 동시에 종아리를 가릴 만큼 길어졌다.
속옷류도 속적삼·다리속곳·속속곳·바지·단속곳 등이 이용되었으나, 편리한 셔츠가 들어오자 이것들은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1920년대에 가면 여유있는 사람들은 속적삼을 셔츠로 입었고, 짧은치마를 입기 시작한 여성들은 아랫도리에 입는 속옷으로 사르마다를 입기 시작하였다. 속치마도 짧은 통치마에 맞춰 짧아지고 허리말기는 조끼형으로 바뀐다.
또한 褙子·마고자·갓저고리·토수도 있었다. 갓저고리는 방한용이므로 주로 추운 북쪽에서 사용하였고, 배자는 기생이나 상류층에서 사치용으로 입었다. 마고자는 상류층 노인들의 외출용과 방한용으로 쓰였고, 토시는 장갑이 등장하면서 서서히 사라졌다.
한편 서양복이 외교관 부인이나 고관 부인 및 유학생에 의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들 가운데 한국 여성으로는 尹高羅가 1899년에 최초로 洋裝을 하였고, 1907년 최활란이 당시 동경에서 유행하던 팜프도어(히사시카미) 머리에 양말과 구두를 신고 검정통치마를 입고 귀국하였다.686)유희경·김문자, 앞의 책, 358쪽. 궁중에서 제일 먼저 양장을 입은 인물은 高宗 皇妃인 嚴妃였다.687)연대는 확실치 않으며 1911년에 사망하였으니 그보다 앞선 것이다.
여학생 교복도 양장으로 제정되는데 국내에서는 1907년 淑明여학교에서 원피스형으로 하고, 1930년 이후는 모두 서양복으로 바뀌었다.
1920년대의 여성들이 서양복을 입는 유행에 대한 풍자로 장옷 쓴 여인과 안경을 쓴 여인을 비교하면서 “전에는 눈만 내놓더니 지금은 눈만 가리는군,” 치마 저고리의 변화에 대하여는 “긴치마를 잘라서 저고리를 느리고 몇자나 남았노”688)≪동아일보≫, 1924년 6월11·15일.라고 하였다.
일본옷도 서서히 퍼지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으로 일본옷을 입은 한국여성은 1894년 귀국한 裵貞子라고 한다. 이 밖에도 일본이 그 세력을 적극적으로 우리 나라에 침투시키고 있을 때였으니 일부 친일파 여인들이 지각없이 일본옷을 착용하기도 하였을 것이다.689)유희경·김문자, 앞의 책, 359쪽.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