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1. 광복 전후의 통일국가 수립운동
  • 2) 신탁통치 논쟁과 좌우대립
  • (4) 신탁통치 문제와 좌우의 갈등
  • 다. 좌·우익세력의 대립과 갈등

다. 좌·우익세력의 대립과 갈등

 해방 후 신탁통치안이 발표되기 이전에는 한민당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세력이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 등 좌익세력의 대두를 반대함으로써 좌우 분열의 기미는 있었으나 직접 분열되지는 않은 상태였다. 우익세력은 안재홍의 국민당, 지주세력을 중심으로 한 송진우 등의 한민당 등이 결성되어 있었고,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 중심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만들어졌으며, 김구 중심의 대한민국임시정부도 중국에서 귀국해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좌익세력과 연합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선도하던 여운형의 조선인민당이 결성되었고 좌익세력은 박헌영의 재건파가 장안파를 누르고 실질적인 조선공산당의 우위를 차지한 상태였다. 신탁통치에 대한 좌우 정치세력의 태도는 신탁통치에 관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전해진 직후에는 강경한 반대라는 동일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익진영은 문자 그대로 결사반대를 주장한 반면 좌익진영은 신중한 반대론을 전개했다. 그 까닭은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이 소련측이라고 당시 서울에 잘못 알려졌기 때문이었다.194)12월 27일 발표된 주요 정당들의 탁치반대성명에는 모두 “소련이 탁치를 주장하였다하니”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동아일보≫, 1945년 12월 28일).

 신탁통치가 소련의 주장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익은 더욱 강렬한 반대를 하게 되었고 좌익은 대중의 탁치반대 열기나 민족적 명분 때문에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를 표명하면서도 주저하는 태도를 보였다. 신탁통치의 발표는 한국민들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왔다. 미·소 군정을 일시적인 점령으로 생각하며 한국의 독립에 열망을 가졌던 한국인들은 우리의 독립보다 미·소 점령국의 이해에 따라 분할하여 통치하려는 그들의 속셈에 대하여 좌우익 및 민족주의세력, 공산주의세력 모두 신탁통치 결사반대와 반탁을 주장하였다.

 신탁통치에 대한 이러한 거족적 반대는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이 조속히 실현되기를 바라는 민족의 열망, 당장 자주정부를 운영할 수 있다는 민족적 자존심, 신탁통치를 변형된 식민지배로 간주하는 오해 등이 상승 작용한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이러한 거족적인 반탁운동을 앞서서 이끌면서 초기 반탁운동의 핵심이 된 것은 임시정부와 김구였다.

 먼저 임정세력이 12월 28일 즉각 국무회의를 열어 반탁결의문을 발표함과 동시에 곧 전체 정계로 확대되면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여기에는 한민당·국민당과 함께 조선공산당과 인민당도 참여했다. 민족주의자들은 12월 31일 반탁데모를 열기로 했으며, 공산당은 별도로 1946년 1월 2일에 열기로 계획하였다.195)1월 1일까지만 해도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는 통일정부 수립방안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고 조선공산당도 ‘탁치문제의 해결은 민족통일전선 결성으로’라는 제하에 탁치반대 내용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 조선인민공화국 및 조선공산당의 1월 1일자 반탁 내용을 포함한 성명은≪朝鮮日報≫, 1946년 1월 1일자 및 2일자에 게재되어 있다. 그러나 좌익세력 공산주의자들은 1월 2일 예정되었던 반탁데모를 취소하고 모스크바협정 지지로 선회하였다. 이른바 반탁에서 찬탁으로의 전환이었다.

 1월 2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위원회가 신탁통치안을 국제적·국내적 해결이라며 지지를 했고, 조선공산당도 즉시 독립보다는 민족통일전선의 완성으로 신탁통치 지지를 표명했다. 이후 좌익진영은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기회를 동원하여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우익측이 이 같은 좌익측의 찬탁 선회를 두고 민족반역자로 매도했을 것196)≪동아일보≫, 1945년 12월 31일.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당시 대중은 신탁통치를 반대했기 때문에 좌익은 찬탁으로 해방 직후의 우위를 상실하고, 우익은 반탁으로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획득했다. 찬탁과 반탁 노선으로 좌우세력의 대립은 본격화되었다. 김구는 독립된 한국통일정부를 목적으로 미·소연합국에 의한 신탁통치 철회를 위해 조선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좌익과 임정을 지지하는 우익을 망라하여 비상정치회의(뒤에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과 여운형은 정치회의에서 좌익세력의 대표권 보장이 어렵고 공산당을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 우익적이며, 신탁통치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포기할 수 없어서 거부하였다. 결국 공산주의세력과 우익 민주주의세력간의 연립은 성사될 수 없었다.

 우익측은 지금까지 비교적 분산되었던 세력들을 반탁운동으로 결집시켜 나갔다. 먼저 임정이 소집한 ‘비상정치회의’와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중심이 되어 비상국민회의를 열었고, 역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임정계가 만든 ‘탁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가 합동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발족시키는 한편 이승만을 의장, 김구·김규식을 부의장으로 하는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을 결성하였다.

 좌익측도 인민당·공산당·조선독립동맹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전국농민조합총연맹’, ‘조선민주청년동맹’, ‘천도교청우당’ 등 29개의 정당과 단체가 모여 여운형·박헌영·허헌·김원봉 등을 의장단으로 하는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함으로써 세력을 결집시켰다.

 이로써 대한정국은 신탁통치 문제를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로 편갈림해서 우익세력은 ‘민주의원’을 중심으로 한 반탁노선으로, 좌익세력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을 중심으로 찬탁노선으로 분열되어 좌우 정치세력의 대립을 가져왔다. 요컨대 한반도에 신탁통치 실시라는 미·소강대국의 자국적 이익에 따라 한민족의 희생이 감수되고 있는 상황에서 남한에서는 찬탁과 반탁을 둘러싸고 좌우익 투쟁이 비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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